| 한글 | 무경 자수 |
|---|---|
| 한자 | 無竟子秀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무경집, 무경실중어록, 불조진심선격초, 추계 유문, 모운 진언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664년(현종 5) |
| 입적 | 1737년(영조 13) |
| 호 | 자-고송孤松, 호-무경無竟 |
조선 후기에 완주, 임실 권역에서 활동한 승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전북 완주와 임실 일원의 사찰에서 주석하며 문집과 어록, 선론(禪論)을 남긴 고승이다.
전주 태생으로 속성은 남양 홍(洪)씨, 아버지의 휘는 세창(世昌), 어머니는 김씨다. 자는 고송(孤松)이며 법명은 자수(子秀), 무경(無竟)은 당호이다. 열두 살에 전북 완주의 송광사 문식(文式) 장로에게 몸을 의지하였고, 16세에 머리를 깎고 징파(澄波)에게 계를 받았다. 완주 추줄산(崷崒山, 위봉산) 운문사(雲門寺)의 추계 유문(秋溪有文, 1614~1689)에게 수학하며 10여 년간 정진하여 선교(禪敎)를 섭렵하고 전법 제자가 되었다. 대사의 법맥은 청허 휴정(淸虛休靜)-정관 일선(靜觀一禪)-임성 충언(任性冲彦)-원응 지근(圓應智根)-추계 유문-무경으로 이어진다.
호남, 영남의 대학자들을 방문하여 큰 뜻을 물었고, 중국의 고대 역사와 노장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통달하였으며, 여러 시체(詩體)와 문장의 격식을 자유자재로 짓는 등 문학적으로도 깊이를 더해 갔다.
1688년에는 스승을 모시기 위해 추줄산 쌍계암에 돌아와 주석하였다. 이듬해 9월 2일 추계가 열반했는데, 이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속가의 예법대로 상례를 행한 후 다시 돌아와 스승의 다비를 승가의 예법을 갖추어 행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대사를 양가(兩家, 승속)의 효자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복을 마친 후 멀리 김천 불령산(佛靈山)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에게 나아가 『화엄원각초(華嚴圓覺鈔)』와 『기신론(起信論)』을 배웠고, 1693년 대사 나이 30세에 추줄산 백련사(白蓮社)에서 개당(開堂)하였다. 그해 가을 같은 산의 내원암(內院庵)에서 강석을 열자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다.
1699년 임실 사자산(獅子山) 용화암(龍華庵)으로 주석처를 옮긴 이후 모악산 장불암(長佛庵), 청량산 서운사(瑞雲寺), 추줄산 서굴(西窟), 추월산 용추사(龍湫寺), 운주산 용장사(龍藏寺), 그리고 광덕산(廣德山)의 여러 사찰을 편력하며 선교를 강론하였는데, 배우는 무리들이 실로 많았다.
다시 1710년에 용추사, 1712년 가을에 청량산 원암사(圓岩寺)에서 강의하고 다시 종남산으로 돌아왔다. 문식 장로가 입적한 후에는 위봉사(威鳳寺)로 주석처를 옮기고 추줄산과 사자산 사이를 전전하였다. 1721년 봄에 임실 신흥사(新興寺)의 적조암(寂照庵)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여러 산문에서 요청해도 가지 않고 암자의 서북쪽 모퉁이의 작은 암자 보경실(寶鏡室)에서 선정에 들며, 강론과 저술에 힘을 쏟았다.
1735년 9월 스승이 주석하던 쌍계암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다가 1737년 7월 21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74세, 법랍은 58년이었다.
「행장」에는 대사가 『불조선격(佛祖禪格)』, 『자기삼궁보경삼매(自己三宮寶鏡三昧)』를 편집하였고, 『이학류편(理學類編)』과 『하락주설(河洛註說)』을 모아 한 편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현재는 문집 『무경집(無竟集)』, 어록 『무경실중어록(無竟室中語錄)』, 논서 『불조진심선격초(佛祖眞心禪格抄)』가 전한다.
문집의 시문에는 소동파의 시와 『장자』가 다수 활용되어 대사의 정서와 사상적 취향을 드러내고, 다양한 시체를 활용한 특징이 있다. 어록에는 법어와 수행 지침, 선과 교의 차이를 담은 논설을 포괄하여 전통적인 선종 어록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일심(一心)의 진여(眞如)에 대해 전개한 논설집 『불조진심선격초』는 조선 후기 선론(禪論)의 성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집필자 : 김종진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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