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모운 진언 |
|---|---|
| 한자 | 慕雲震言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벽암 각성, 화엄품목문목관절도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622년(광해군 14) |
| 입적 | 1703년(숙종 29) |
| 호 | 모운(慕雲) |
조선 후기 화엄학 연찬에 힘을 쏟은 승려
17세기 후기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제자로서 화엄 교학에 조예가 깊어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린 승려이다. 화엄대회를 개최하는 등 화엄학 강의로 삼남 지방에서 명성을 얻었고, 『화엄경』을 분석하여 도상(圖像)으로 정리한 저술을 남겼다.
진양(晋陽: 진주) 사람으로 1622년(광해군 14) 2월 초7일 태어났다. 자는 취점(就占)이며 속성은 정(鄭)씨, 어머니는 노(魯)씨다. 13세쯤 되어 의열(義悅) 노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고, 의심(義心) 장로를 모시고 두루 공부하여 불교 외의 학문에도 능통하였다. 20세에 벽암 각성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후 수십 년을 가까이 모시며 대승 소승의 비밀 경론을 모두 전수받아 스승의 정수를 얻게 되었다.
이후 모악산, 덕유산, 가야산, 불영산, 황악산, 팔공산, 축서산, 지리산을 편력하며 교화를 행하였고, 가는 곳마다 제자를 양성하였다. 대사는 만년에는 『화엄경』을 중요 교설로 삼아 강론하였는데, 그것을 글로 적은 것을 당시에 ‘화엄십만설(華嚴十萬說)’이라 하였다고 한다.
1686년(숙종 12) 가을 팔공산 운부정사(雲浮精舍)에서 비로장해(毘盧藏海)를 열고 화엄법회를 거듭하여 열자, 수백 명의 승려는 물론 지역의 관리까지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후 대사는 호서, 호남, 영남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 조선 후기에 화엄학이 흥성하게 부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연로해지자 직지사와 쌍계사에 머물며 교화하였다. 직지사에서 강석(講席)을 펼 때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이 참학하였는데, 대사는 환성의 그릇을 간파하여 강석을 물려주고 은거했다고 전해진다. 대사는 1703년(숙종 29) 3월 21일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82세, 법랍 67년이다.
시문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전하지 않는다. 저술로는 『화엄경』과 관련한 도상(圖像)인 「대방광불화엄경칠처구회품목지도(大方廣佛華嚴經七處九會品目之圖)」, 「사회삼백일십대위문목지도(四會三百一十大位問目之圖)」, 「화엄사과관절도(華嚴四科貫節圖)」가 있다. 입적 후 1709년(숙종 35)에 제자들이 이를 모아 양산 천성산 상원암(上院庵)에서 간행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전서』 제8책에는 이들을 묶어 『화엄품목문목관절도(華嚴品目問目貫節圖)』라는 제목을 붙여 수록하였다.
모운의 화엄학 강의와 행적, 저술은 조선 후기 화엄 교학의 연찬이 성행하기 시작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
· 집필자 : 김종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