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화악 문신 |
|---|---|
| 한자 | 華岳文信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취여 삼우, 월저 도안, 육신보살 |
| 시대 | 조선 중기 |
| 출생 | 1629년(인조 7) |
| 입적 | 1707년(숙종 33) |
| 호 | 화악(華岳) |
조선 중기 대둔사 13대 종사 가운데 한 분
대둔사 13대 종사(宗師) 가운데 한 분으로 소요파 취여 삼우(醉如三愚, 1622~1684)의 법을 이었다.
전남 해남 화산(華山)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호는 화악(華岳)이고, 법명은 문신(文信)이다. 농사일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피곤해서 상원루(上院樓) 밑에 이르러 짐을 벗어놓고 쉬고 있을 때, 마침 그 누각에서는 취여 강백이 대중들을 모아놓고 『화엄경』의 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화악은 누각 아래에서 한두 구절을 엿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단박에 지고 있던 농기구를 장사하던 친구에게 넘겨주고 누각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취여 대사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자, 취여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그 뒤 취여 대사의 가르침에 따라 매일 밤 주워온 솔방울로 불을 밝히고 새벽 3~5시까지 글 읽기를 3년을 공부한 뒤 소요파(逍遙派) 취여의 법맥을 전수받았다. 이후로 대둔사를 떠나 전국 여러 지방으로 돌며 선지식들을 참배하고 그들로부터 지도를 받고 다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가 강론 법회를 여는 날이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북쪽에서 명성을 떨치던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이 대둔사에 온 일이 있었는데, 화악은 그와 선지(禪旨)를 토론하고는 그를 종주(宗主)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여기고, 함께 있던 모든 대중을 월저 대사에게 양보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크게 놀라며 뒤로 물러나는 것을 만류하였지만, 화악은 그들에게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니라.”라 말하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월저 대사의 화엄법회가 끝날 때까지 면벽(面壁) 수행하였다. 월저는 법회를 마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남쪽 지방에 갔다가 육신보살(肉身菩薩)을 친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1629년에 태어나서 1707년에 입적하였으니 세수 79세였다. 다비 후 사리 2과를 얻어 대둔사에 탑과 비를 세웠다. 문인으로는 설봉(雪峰)과 벽하(碧霞) 등 21명이 있으며, 진영은 대흥사 상원(上院)의 영각(影閣)에 모셔져 있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