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호의 시오 |
|---|---|
| 한자 | 縞衣始悟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대흥사, 완호 윤우, 낭암 시연 |
| 시대 | 조선 후기 |
| 출생 | 1778년(정조 2) |
| 입적 | 1868년(고종 5) |
| 호 | 호의(縞衣) |
조선 후기 대흥사 승려
조선 후기 대흥사 승려로 전국의 강백을 찾아다니면서 공부하여 견문과 경전에 대한 학식을 갖추었다. 그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초의(草衣), 하의(荷衣)와 함께 삼의(三衣)라 불린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속성은 정씨(丁氏), 이름은 계방(桂芳)이다. 아버지는 삼달(三達)이고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호는 호의(縞衣), 법명은 시오(始悟)이다. 부모를 연이어 여읜 뒤, 화순에 있는 만연사(萬淵寺)에 들어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절에 화재가 났고, 다음 해에 다시 수리하는 불사(佛事)에 전국에 있는 많은 목수가 모이게 되었다. 이때 도료장(都料匠: 목수의 최고 책임자)을 맡고 있는 경관(慶冠)이 불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불사를 마치고 떠나는 경관을 따라간 호의는 1796년(정조 20)에 그를 은사로 출가하고, 백련(白蓮) 선사에게는 구족계를 받았다. 뒤에 대둔사 명적암(明寂庵)에 있는 연담 유일(蓮潭有一)을 찾아가 이력 과정 가운데 하나인 사집(四集) 과정을 배웠다.
1802년(순조 2) 봄에는 함평에 있는 용흥사(龍興寺) 말사인 용문암(龍門庵)으로 가서 『반야경』을 공부하였으며, 12월에는 남평 운흥사(雲興寺)에 있는 관음전에서 『원각경』을 공부하였다. 또 1804년(순조 4)에는 나주 쌍계사(雙磎寺)에 있는 문수암(文殊庵)에 살면서 『화엄현담』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완호 윤우(玩虎倫佑)·낭암 시연(朗巖示演) 등으로부터 『능엄경』, 『반야경』, 『원각경』, 『화엄경』 등 여러 경전을 배웠으며, 1812년(순조 12)에 환호에게 법을 이어받았다.
1817년(순조 17)에 시봉하던 완호를 따라 기림사(祇林寺)로 가서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배에 싣고 돌아오다가 일본 장기도(長崎島) 축전현(筑前縣)에 표류하였다가 이듬해인 1818년(순조 18)에 일본에서 돌아와 7월 15일에 본사에 돌아왔다. 1821년(순조 21) 은사 경관이 입적하자 입관의 예를 다하고, 다음 해인 1822년에 도장사(道藏寺)에 머물렀다. 이후에도 만일암(挽日庵), 남암(南庵), 진불암(眞佛庵) 등에 거주하였다. 1858년(철종 9)에 초의 선사와 함께 법사로 모셨던 완호의 비석을 세웠다.
1868년(고종 5) 입적하였으니, 세수 91세이고, 법랍 72년이다. 저술로는 『견문록(見聞錄)』 1권이 있다. 대사는 사람들의 비리를 보면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하지만 천한 일이나 힘든 노역을 몸소 앞장서서 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항상 의식이 넉넉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권속들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그의 호에 대하여 게송을 지었고, 홍현주(洪顯周, 1793~1865)가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글을 썼으며, 신헌영(申獻永)이 진영에 대하여 찬을 쓰고 아울러 그의 탑명도 썼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