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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찰

한글원찰
한자願刹
유형역사
키워드원당, 진전사원, 능침사
시대삼국시대~조선시대
공간전국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창건하거나 중창한 사찰
원찰은 죽은 사람의 복을 빌거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한 절이다. 원찰은 원당, 능침사 등 다른 명칭으로도 불린다. 진영을 봉안하여 망자를 추선하거나, 특정 개인을 위해 기도하거나, 혹은 개인적인 소원을 빌기 위한 사찰 내 건물을 원당(願堂)이라고 하는데, 내불당(內佛堂)이나 내원당(內願堂)처럼 궁궐 안에 두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시대의 왕과 왕비의 진영이나 상을 봉안한 국가적인 시설인 진전사원(眞殿寺院)을 원찰로 보기도 하며, 왕릉 근처에 조성한 능침사(陵寢寺)도 원찰에 해당된다. 또한 원찰을 새로 짓기도 했지만, 기존 사찰의 중수‧중창을 계기로 특정인의 원찰이 되기도 했다. 원찰은 운영 주체가 다양했다.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원찰이 조성되었다. 544년(진흥왕 5)에 지은 흥륜사(興輪寺), 553년 창건된 황룡사(皇龍寺)를 비롯하여,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감은사(感恩寺), 무열왕이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봉덕사(奉德寺) 등은 신라의 대표적인 왕실 원찰이었다. 신라의 관청 중 원당전(願堂典)은 이러한 왕실 원찰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관사(官寺)의 역할을 했던 성전사원(成典寺院)도 왕실의 원찰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도 왕실과 지배층들의 원찰이 계속 운영되었으며, 특히 ‘원찰’이라는 용어가 고려시대 금석문과 『고려사절요』·『고려사』 등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주목된다. 현화사(玄化寺)나 흥왕사(興王寺) 같은 진전사원 외에도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正陵) 곁에 있던 절을 중수하여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로 이름을 바꾸고 원찰로 삼았다. 한편 지배층의 원찰도 많았는데, 무신 정권기 장군 이지영(李之榮)의 원찰인 보달원(普達院), 강화천도기 최우가 창건한 선원사(禪源寺)가 대표적이다. 원(元) 간섭기에는 묘련사(妙蓮寺) 등 원 황실을 위한 원찰도 운영되었다. 한편 여성이 세운 원찰도 확인된다. 원찰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운영되었다. 왕릉 근처에는 원찰이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고, 사찰의 전각이 원당으로 운영되면서 왕실에서 발급받은 완문(完文) 등을 통해 지역(紙役) 등에서 벗어나려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도 왕실 원찰로 지정된 사찰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지고 어필(御筆)이 하사되기도 했는데, 파계사(把溪寺)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사족들이 운영한 분암(墳庵) 등도 일종의 원찰로 볼 수 있다. 개인이나 집안은 원찰에 토지나 노비를 시납했고, 이는 원찰 혹은 원당이 된 사찰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시대 왕실 원찰이거나 혹은 원당이 설치된 사찰은 내수사(內需司)와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내수사는 이러한 사찰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 집필자 : 강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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