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수선사 |
|---|---|
| 한자 | 修禪社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결사, 정혜쌍수, 돈오점수,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 간화선, 지눌, 혜심, 선종 |
| 연도 | 1188년(명종 20) |
| 시대 | 고려시대 |
| 관련장소 | 송광사(松廣寺), 월남사(月南寺), 단속사(斷俗寺), 쌍봉사(雙峯寺), 선원사(禪源寺) |
| 관련인물 | 지눌(知訥), 혜심(慧諶), 충지(冲止) |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개설한 선종의 결사
수선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시작한 선종 신앙결사의 이름이면서 결사가 운영된 사찰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눌은 1158년(의종 12)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하여 출가한 뒤, 1182년(명종 12) 승과를 보기 위해 개경으로 올라왔다.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며 개경 불교를 경험하였으나 불교계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하여 1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정(定)과 혜(慧)를 닦는 결사를 만들기로 맹세했으나 승과가 끝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지눌은 승과에 합격한 뒤 창평(전남 담양군 창평면) 청원사(淸源寺)에 주석하며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첫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고는 주지직을 그만두고 남쪽을 유력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1185년에는 예천(경북 예천군) 하가산 보문사(普門寺)에서 수행하며 대장경을 열람하다 이통현(李通玄)이 지은 『화엄경론(華嚴經論)』을 읽던 중 두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이 무렵 승려 득재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서 정혜결사를 개창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결사를 개창한 뜻을 밝혔다. 1198년(신종 1)에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던 중 세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한편, 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거조암보다 넓은 곳을 찾게 되었고, 1205년(희종 1) 전남 순천 송광산의 새 절로 결사의 근거지를 옮기고, 결사의 이름을 정혜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깨달음과 수행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독자적인 수행 전통을 확립하였다.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론과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을 강조하였고, 삼문(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을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제시하였다. 수선사의 수행과 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지눌의 선 사상과 실천 체계는 선의 입장에서 화엄을 수용하였고, 간화선 수행을 받아들이며 고려 선종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었다. 지눌의 사상은 2세 혜심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지눌이 수선사를 개창하고 송광사로 결사의 근거를 옮겨 정착하는 과정에는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수선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당시 최씨 무인정권은 수선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2세 사주인 혜심이 수선사를 주도할 무렵 수선사는 최우의 후원을 받으며 왕실·무신 세력·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하고 중앙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영향력이 커졌고, 경제적인 기반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혜심 역시 지눌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치세력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수선사는 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 이후 최씨 정권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대몽항쟁기 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특히 강도(강화도)에 세운 최우의 원찰인 선원사의 사주를 거친 승려가 잇달아 수선사의 사주가 되었던 것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원(元) 간섭기 수선사는 다소 위축되기도 했고, 지눌의 결사정신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수선사에서 이루어낸 새로운 불교운동은 이후 한국불교사에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 집필자 : 강호선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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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임금이 칙명을 내려 송광산을 조계산(曹溪山)으로, 길상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고쳐 부르게 했다. 금나라 동해후[東海侯(衛紹王)] 태안(太安) 2년 봄 3월 27일에 평소와 같이 설법을 마친 후 열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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