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선학원 |
|---|---|
| 한자 | 禪學院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송만공, 백용성 |
| 연도 | 1921년 |
| 시대 | 근현대(20세기) |
| 공간 | 선학원, 선리참구원 |
| 관련인물 | 만공 월면 |
1921년 선종의 수행 기풍과 계율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선승들이 서울에 설립한 불교 단체
1921년에 만공 월면(滿空月面, 1871~1946)을 비롯해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등 대표적인 선승들이 서울 사동(寺洞)에 선학원(禪學院)을 설립했다. 수덕사(修德寺)의 송만공은 근대 선의 중흥조인 경허 성우(鏡虛惺牛)의 법을 전수한 당대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백용성은 1911년 서울에 대각사(大覺寺)를 건립했고, 1919년 3.1운동 때는 한용운(韓龍雲, 1879~1944)과 함께 불교계 인사로서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선학원은 선 수행 전통의 계승과 중흥을 내걸고 독립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1922년에는 선을 수행하는 수좌들의 수행풍토 진작을 위해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만들었다. 선우공제회는 본부를 선학원으로 하고 전국의 선방 19개소에 지부를 두었다. 이후 선학원은 재정 문제로 1926년 범어사(梵魚寺)의 경성 포교당이 되었지만, 1931년에 재건하여 전국 선승들의 중앙본부 역할을 하는 한편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다.
선학원은 1934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中央禪理參究院)으로 다시 인가를 받았다. 1935년 3월에는 전국 수좌(首座) 대회를 열어 종규를 제정하고 ‘조선불교 선종(禪宗)’이라는 독자적 종명을 선포했다. 한편 중앙기관 설립을 추진했지만, 총독부의 허가를 얻지 못했고 계속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선학원 측은 선종으로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시체제기에 선학원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고 1945년 해방까지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한국불교의 자주적 종단을 건립하려는 시도는 1920년대 이후 계속되었다. 특히 1929년에 열린 조선불교 선교양종 전국 승려대회에서는 종헌을 제정하고 자율적 교정을 추구했다. 또 1931년에 조선불교 청년총동맹은 종헌 실행을 촉구하고 사법 개정운동을 벌이는 등 정교분리와 불교 자주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는 못했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전시 상황에서 불교계 주류의 정치적 타협과 친일 행위가 증가했다.
해방 후 6.25전쟁을 겪고 1954년부터 정화운동이 시작되면서 비구와 대처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때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비구 측에서는 비구승대회를 열어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아닌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을 종조로 삼는 종헌 개정안을 냈다. 당시 이는 비판을 받아 인정되지 않았고, 결국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의 종조는 초조 도의(道義), 중천조 보조 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의 형태로 귀결되었다.
1973년에는 지상 4층의 현대적 가람으로 선학원이 중창되었고 선원(禪院)이 상설 운영되었다. 그런데 1978년 선학원 정관에서 ‘조계종’ 명칭이 삭제된 이후 조계종과 갈등을 빚어 왔고 역사적 연원이 다름을 내세우며 전국 수백 개 분원에 대한 재산권도 별도로 행사했다. 그러다 1994년 조계종의 개혁종단 출범 후에 협의를 계속하여 2002년에 양자는 공통의 역사 이해를 통해 공동의 노선을 취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선학원은 근현대사의 부침 속에서 선종 전통을 수호하는 데 구심점이 된 기관으로 중요한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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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城府仁寺洞에梵魚寺布敎堂이存在하든것은 아즉도우리의印象이尙存한바 該布敎堂을安國洞四十番地로移建하야 禪學院이라는名稱으로밧구어진後에는 梵魚寺布敎堂은無何有鄕으로歸하엿더니 五月一日付로써 同禪學院으로써梵魚寺布敎所를하겟다는 布敎所設置屆를京城府에提出하엿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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