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삼처전심

한글삼처전심
한자三處傳心
유형역사
키워드선문염송설화, 청허 휴정, 백파 긍선, 초의 의순, 삼종선
시대고려 후기~조선
관련인물구곡 각운, 청허 휴정, 백파 긍선, 초의 의순
부처가 세 곳에서 교외별전의 선을 마하가섭에게 전했다는 설
부처가 세 곳에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전수했다는 설이다. 삼처전심은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이다. 다자탑전분반좌는 초기 경전인 『아함경』 등에 근거한 것으로 사위국(舍衛國)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 부처가 설법하다가 가섭에게 자신의 자리 반을 나눠주며 앉으라고 한 것으로, 처음으로 마음을 전한 것이다. 영산회상거염화는 송대의 『전등회요(傳燈會要)』에 전거를 둔 것으로 부처가 영산회상에서 금색 바라화(波羅花)를 들어 보이자 아무도 뜻을 몰랐는데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는 것으로, ‘염화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니련하반곽시쌍부는 『열반경』 「다비품(茶毘品)」에 나오는데 부처가 열반에 든 뒤에 가섭이 뒤늦게 와서 슬피 울자 부처가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놓았다는 내용이다. 중국 선종에서는 교외별전의 조사선(祖師禪)의 뛰어남을 보여 주는 사례로서 이 설들을 활용했다. 고려에서도 13세기 말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의 찬술로 전하는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을 인용하여 염화미소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이 셋을 조합하여 ‘삼처전심’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고려 말인 14세기 구곡 각운(龜谷覺雲)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서이다. 각운은 곽시쌍부에 대한 주석에서 삼처전심을 설명하면서 각각 ‘전살(專殺)’, ‘전활(專活)’, ‘살활제시(殺活齊示)’로 해석했다. 이후 16세기 후반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는 “세존이 삼처에서 마음을 전한 것이 선의 취지가 되고 일생일대에 설한 바가 교의 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을 부처의 마음, 교를 부처의 말씀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부처가 마음을 전한 선의 상징적 용어로 삼처전심을 쓰고 있다. 휴정의 『선가귀감』은 일본 에도시대에 다섯 번 간행되고 주석서가 나올 정도로 관심을 끌었는데, 임제종 정통주의와 삼처전심이라는 독특한 전법 인식이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18세기의 교학자 묵암 최눌(黙庵最訥, 1717~1790)의 『제경회요(諸經會要)』에 「여래삼처전심(如來三處傳心)」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삼처전심을 각각 ‘체(體) 살인도 대기(大機)’, ‘용(用) 활인검 대용(大用)’, ‘체용쌍전(體用雙傳) 살활제시’로 보고 있다. 이후 19세기 선 논쟁의 단초를 연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은 선을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 3종으로 차등적으로 구분했는데, 이를 임제(臨濟)의 삼구(三句)와 삼처전심에 배대했다. 또 삼처전심의 1처 분반좌는 진공(眞空)으로 활(活)이 없는 살인도임에 비해, 2처 염화미소는 묘유(妙有)로서 살활과 기용(機用)을 갖춘 활인검이라고 하여 높이 평가했다. 이에 대해 초의 의순(草衣意恂)은 살활과 기용, 체용 등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여서 오로지 살과 활만 있다고 해도 반드시 각각 활과 살을 겸하는데, 살만 있고 활은 없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또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설두 봉기(雪竇奉琪, 1824~1889) 등도 선 논쟁에서 삼처전심을 언급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관련자료

  • 조선 불교사상사
    도서 김용태 |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1 상세정보
  •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한 논의 연구: 기원과 의미를 중심으로
    학술논문 김성욱 | 불교학연구 | 46 | 서울: 불교학연구회 | 2016 상세정보
  • 일본에서의 『선가귀감』 간행과 그 영향
    학술논문 오가와 히로카즈 | 한국사상사학 | 53 | 서울: 한국사상사학회 | 2016 상세정보
  • 더보기  +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