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사굴산문 |
|---|---|
| 한자 | 闍崛山門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선종구산, 수선사, 임제선, 지눌, 정혜사 |
| 연도 | 847년 |
| 시대 | 신라하대 ~ 고려시대 |
| 공간 | 전국 |
| 관련장소 | 굴산사, 송광사, 단속사, 월남사, 선원사 |
| 관련인물 | 범일국사, 보조국사 지눌, 담진, 탄연, 지인 |
신라하대 범일국사가 강원도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선종 산문
사굴산문은 신라하대 범일(梵日)이 강원도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산문이다. 범일은 명주(강릉) 출신으로 15세 무렵 출가하여 경주에서 구족계를 수계한 뒤 흥덕왕 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선을 배우고 827년경 귀국하였다. 귀국 후 경주에 머물다 851년(문성왕 13) 경주를 떠나 백달산에 머물다 고향인 명주로 갔다. 명주에서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의 후원으로 굴산사를 개창하고 산문을 열었다. 이후 범일의 사굴산문은 범일-개청으로 이어지면서 명주 일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사굴산문은 고려시대 선종 구산문이 정립될 때 구산선문 중 하나가 되었다. 화엄종과 법상종을 중심으로 한 교학불교가 교단의 중심이 되었던 고려 전기에는 사굴산문에 속하는 선승들의 활동이 거의 찾아지지 않지만, 고려 중기 이후 사굴산문은 가지산문과 함께 선종의 가장 대표적인 산문으로 부상하였다. 고려 중기에 사굴산문이 다시 부상한 것은 혜조국사 담진과 관련이 깊다. 담진은 송에 유학하며 북송의 선풍을 수용하였는데, 이때 담진이 전래한 임제선은 이후 고려 선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담진은 예종의 후원을 받아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었고, 예종은 아들인 지인(之印)을 담진의 문하에 출가시켰다.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은 담진의 뒤를 이어 사굴산문을 이끌었다. 그는 중국 임제종 승려들과 서신으로 활발하게 교류하였고, 인종 대 왕사에 책봉되었다. 담진의 문도로는 탄연, 지인 외에 영보(英甫)-조응(祖膺)-자엄(資嚴)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도 확인되는데, 담진과 그의 법손들은 12세기 사굴산문의 중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후 최충헌이 권력을 잡은 뒤 두경승(杜景升)의 난에 대선사(大禪師) 연담(淵湛)이 연루되어 유배되면서 담진계 사굴산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한편, 무신 집권기 이후 사굴산문은 지눌이 개창한 수선사(修禪社)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최우가 수선사를 적극 후원하면서 사굴산문은 대몽항쟁기 불교계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 사굴산문에 속하는 주요 사찰로는 수선사(송광사) 외에 담진의 하산소(下山所)인 정혜사(定慧寺), 탄연의 하산소인 단속사(斷俗寺)가 있었으며, 그 외에 월남사(月南寺)·선원사(禪源寺) 등을 꼽을 수 있다.
원(元) 간섭기가 시작할 무렵 사굴산문은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도 했으나 다시 그 세력을 회복하였다. 공민왕 대 이후 왕사와 국사 중 한 명은 사굴산문에서 책봉할 정도로 사굴산문은 고려불교를 이끄는 중심 산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개별 산문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집필자 : 강호선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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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1260, 원종 1) 10월에 하산하여 원(院)에 들고 당(堂)에 올랐으며 법을 설하여 중생을 이롭게 한 것이 모두 12년이었다. 왕의 외숙인 경지(鏡智) 대사가 조정의 명을 받아 사굴산(闍崛山)으로 승적을 옮기고 품일의 후손이 되어 단속사에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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