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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연구회

한글불교연구회
한자佛敎硏究會
유형역사
키워드원흥사, 명진학교
연도1906년
시대근대
관련장소원흥사
관련인물홍월초, 이보담
1906년 홍월초, 이보담이 주도하고 일본 정토종의 지원을 받아 원흥사에 두어진 불교 연구 단체
불교계는 19세기 후반부터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아 문명개화의 근대화를 추구했다. 1899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아 전국 수사찰로 서울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건립되었다. 1902년에는 정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칙령으로 원흥사에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두어졌고 도섭리(都攝理)가 파견되었다. 이때 원흥사는 대법산(大法山)이 되었고 지방에는 16개의 중법산(中法山)을 지정하여 전국 사찰을 그 아래에 편제했다. 당시 반포된 대한제국 사찰령 36조는 국가에서 사찰재산을 관리하고 정식 승려 자격을 주는 도첩제의 시행 등을 골자로 했다. 또 충과 효, 왕법 준수 등 8개 종칙이 제정되고 불교계의 정치 참여를 금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으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고, 1906년에는 일본불교계의 한국사찰 관리와 보호를 허용하는 사찰관리세칙이 시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제도 개혁과 신식 교육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그 첫 결실이 1906년 불교연구회의 발족이었다. 불교연구회는 홍월초(洪月初, 1858~1934)와 이보담(李寶潭, 1859~1945 이후)이 주도했고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후원을 받아서 원흥사에 만든 것이었다. 불교연구회는 불교계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어 최초의 근대적 불교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를 원흥사에 세웠다. 명진학교는 동국대의 전신으로서 당시 전국 사찰에서 승려 학인들을 선발하여 불교와 신학문을 가르쳤다. 불교연구회를 후원한 일본 정토종은 수원에 수원사, 인천에 인천사 등 각 지역의 이름을 딴 사찰을 세우는 등 현지화 전략을 취하여 전국적인 포교에 나섰다. 이는 정토신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한글로 된 정토종 홍보 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또 대한제국 황실의 사전(四殿: 황제, 황후, 태후, 황태자)에 대한 전패(殿牌)를 모시고 축원을 하는 등 황실의 호감과 함께 인심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정토종은 일본불교의 다른 종파에 비해 조선 포교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대한제국 정부의 고관들도 적극적으로 포섭했고, 교육을 위한 학교설립도 추진했다. 불교연구회를 조직한 홍월초는 조선 전기 교종 본사였던 봉선사(奉先寺) 출신으로 서울 화계사(華溪寺)의 주지를 했고,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총섭에 이어 1902년 대한제국 사사관리서 체제에서 서울 부근 사찰을 총괄하는 내산섭리(內山攝理)를 지냈다. 1906년에 불교연구회의 초대 회장과 명진학교의 교장을 맡았으며, 이듬해 명진학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근대식 승려 교육과 불교근대화의 주역이었다. 이후에는 전통적인 강원교육에도 힘을 쏟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그와 함께 불교연구회 결성을 주도했던 이보담은 불교연구회 제2대 회장과 명진학교 교장을 거쳐 서울 봉원사(奉元寺)와 황해도 성불사(成佛寺)의 주지를 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관련자료

    이미지
    원흥사
    김광식 편·윤창화 사진, 『한국불교 100년: 1900-1999』, 민족사, 2000, 41쪽. 상세정보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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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계종사: 근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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