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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한글북한산성
한자北漢山城
유형역사
키워드남한산성, 벽암 각성
연도1711~1894년
시대조선 후기
관련장소중흥사
관련인물계파 성능, 벽암 각성, 호암 약휴
조선 후기에 남한산성과 함께 의승군이 방비를 맡아 서울 수호를 담당한 산성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 9월에 축성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7,620보였고 대문 4개, 암문 10개, 장대(將臺) 3개 등이 설치되었으며 124칸 규모의 행궁(行宮)이 조성되었다. 또 산성 내에는 곡식을 비축하고 군기를 갖추어 방어 요새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 함께 방비를 위해 승영(僧營)이 두어졌는데, 최고위 승직인 도총섭(都摠攝) 밑에 중군(中軍) 좌·우 별장(別將)과 천총(千摠), 좌·우 병방(兵房), 교련관(敎鍊官), 기패관(旗牌官) 등이 배속되었다. 산성 내에는 원래 있던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太古寺) 외에 국녕사(國寧寺), 보광사(普光寺), 보국사(輔國寺), 부왕사(扶旺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용암사(龍巖寺), 원각사(圓覺寺), 진국사(鎭國寺)를 지어 모두 11개의 진호(鎭護) 사찰이 세워졌다. 이 가운데 수사찰은 중흥사였고, 각 사찰에는 승장(僧將), 수승(首僧)이 1명씩 배정되었다. 승영 사찰은 북한산성 3군영(軍營)의 관할구역 내에 위치하여 방어를 담당했는데,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상운사, 서암사, 진국사는 산성 북쪽, 금위영(禁衛營) 소속의 보광사, 보국사, 용암사, 태고사는 산성 동쪽, 그리고 어영청(御營廳) 소속의 국녕사, 원각사, 부왕사는 산성 서쪽을 지켰다. 북한산성 승영을 이끄는 승대장(僧大將)은 8도 도총섭으로서 전국의 승려 동원과 산성 승군 관리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초대 북한산성 도총섭은 남한산성의 첫 8도 도총섭을 지낸 부휴계(浮休系) 벽암 각성(碧巖覺性)의 문손인 계파 성능(桂坡聖能)이었다. 성능은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을 새로 짓고 통도사(通度寺)의 세존사리탑을 중수했으며, 1701년에 그가 주석했던 화엄사에 숙종이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의 편액을 내려준 뒤 10년 만에 북한산성의 첫 도총섭으로 임명되었다. 성능은 1711년부터 약 30년에 걸쳐 도총섭 직책을 수행했고, 북한산성의 연혁과 현황을 담은 『북한지(北漢誌)』를 펴냈다. 1714년에는 남·북한산성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가 확립되었다. 북한산성에는 승군 약 350명이 1년에 두 달씩 여섯 차례에 걸쳐 교대로 번을 섰다. 남한산성까지 합치면 연간 700여 명의 승군이 동원되었고,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의 승려들이 와서 입역하는 방번제가 시행된 것이다. 그러다 북한산성 도총섭을 지낸 호암 약휴(護岩若休)의 승려 신역(身役) 혁파 건의를 받아들여 1756년(영조 32) 남·북한산성 의승군의 윤번제를 방번전제(防番錢制)로 바꾸었다. 이는 승려들이 멀리 산성까지 와서 교대로 역을 서는 대신 매년 지역별로 승려 수와 비용을 정하여 고용전(雇用錢)을 거두어 상주 승군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1785년(정조 9)에는 잡역과 공물 납부로 사찰의 방번전 부담이 크고 승역을 지는 승려 수가 크게 줄었다는 이유로 남·북한산성의 의승 방번전을 감액하였다. 번전은 이전의 약 40% 정도로 줄었고 결손액은 다른 재원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1750년(영조 26) 군포(軍布)를 2필에서 1필로 줄인 균역법(均役法) 시행으로 양인의 국역 부담이 경감되고 승역이 양역보다 상대적으로 커졌기에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도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북한산성 의승군은 19세기에도 지속되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관련자료

  • 조선 불교사상사
    도서 김용태 |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1 상세정보
  • 남북한산성 의승번전의 종합적 고찰
    학술논문 김갑주 | 불교학보 | 25 | 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 1988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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