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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림산문

한글봉림산문
한자鳳林山門
유형역사
키워드봉림사, 심희, 충담, 고달사, 찬유
시대신라하대~고려시대
공간경남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165,168,175,176,177
관련장소봉림사(鳳林寺), 고달사(高達寺)
관련인물심희(審希), 충담(忠湛), 찬유(璨幽), 현욱(玄昱)
신라하대 진경 심희가 경상남도 봉림사에서 개창한 선종 산문
봉림산문(鳳林山門)은 신라하대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가 오늘날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산에 봉림사를 짓고 개창한 산문이다. 신라하대 산문을 개창한 선승들은 신라에서 화엄종 사찰로 출가하여 화엄학을 공부하다 당에 유학을 가서 남종선을 공부하고 귀국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봉림산문을 개창한 심희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국내에서 선을 공부하여 주목된다. 심희의 집안은 가야 왕실의 후손인 김유신(金庾信)계의 신김씨(新金氏)로, 심희가 봉림사를 창건할 때 김해 지역의 지방 세력인 김인광(金仁匡)·소율희(蘇律熙, 金律熙와 동일인) 등의 후원을 받은 것도 그의 출신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9세에 혜목산(惠目山) 고달사(高達寺)에서 현욱(玄昱, 787~869)에게 출가하여 19세에 구족계를 받은 뒤, 송계선원(松溪禪院)과 설악(雪岳) 등 각 지역을 다니며 수행하다 창원으로 내려와 봉림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심희는 진성왕의 요청은 거절하였으나, 봉림사를 창건한 이후 효공왕~경명왕 대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918년(경명왕 2)에는 경명왕의 요청으로 경주의 왕궁에서 설법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심희가 봉림사를 창건한 때부터 입적할 때까지가 봉림사를 중심으로 한 봉림산문의 전성기로, 심희 입적 당시 문도가 500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심희가 개창한 봉림산문의 주요 단월(檀越)은 무엇보다도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들이었다. 봉림산문 개창을 후원한 소율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심희 입적 이후 후백제의 경주 침략을 겪으며 김해와 창원 지역 호족들이 몰락한 것이 봉림산문 쇠락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심희의 문도인 찬유(璨幽)나 충담(忠湛)이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고 남한강 유역의 고달사나 흥법사에 주석한 것은 후삼국 말의 동향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심희가 개창한 봉림산문은 고달원(고달사) 및 원주 흥법사(興法寺)와도 관계가 있었다. 심희가 출가한 곳이 고달사이며, 그의 제자인 찬유가 태조에게 귀의한 후 주로 머물며 선풍을 펼친 곳 역시 고달사이다. 고달사는 광종의 법안종(法眼宗) 수용 및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관련이 있어 주목되는 절이다. 충담은 무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심희를 찾아가 수학하였고,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918년 봉림사로 가서 다시 심희의 문하에 머물다 920년 개경으로 올라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었다. 한편, 봉림산문은 고려 초 이후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 구산선문을 정리하면서 구산문 중 하나로 꼽고 있다. 나말여초 흥성하던 봉림산문은 고려시대에 급속히 쇠락하다 조선 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으며,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의 승탑과 탑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 집필자 : 강호선

용례

관련자료

  • 羅末麗初 禪宗山門 開創 硏究
    도서 조범환 | 서울: 경인문화사 | 2008 상세정보
  • 眞鏡 審希의 활동과 鳳林山門
    학술논문 배상현 | 사학연구 | 74 | 과천: 한국사학회 | 2004 상세정보
  • 신라 말 김해지방의 호족세력과 선종
    학술논문 최병헌 | 한국사론 | 4 | 서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 1978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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