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본말사 제도 |
|---|---|
| 한자 | 本末寺 制度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사찰령 |
| 연도 | 1911년 |
| 시대 | 일제 강점기 |
| 관련장소 | 봉은사, 봉선사 등 31사 |
일제 강점기 사찰령 체제하에서 30본산(이후 31본산)에 본사와 말사를 둔 제도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강제병합 직후 한국불교 통합종단인 원종(圓宗)의 종정 이회광(李晦光)은 10월에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비밀리에 연합조약을 체결했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종파와 조사를 바꾸었다는 ‘개종역조(改宗易祖)’의 ‘매교(賣敎) 행위’라는 비판과 함께 거센 반발이 일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 박한영(朴漢永) 등이 주도하여 1911년 1월에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담은 임제종(臨濟宗) 건립운동이 일어났다. 임제종 측에는 통도사(通度寺), 해인사(海印寺), 송광사(松廣寺)의 삼보사찰과 범어사(梵魚寺)를 비롯한 영·호남의 주요 사찰이 가담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자주적 움직임을 보인 임제종을 인정하지 않았고, 또 일본불교의 한 종파에 연계된 원종도 인가해 주지 않았다. 대신 총독부가 선택한 정책 방향은 한국불교를 직접 관리·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11년 6월 3일에 「사찰령(寺刹令)」, 9월 1일에 「시행규칙」이 반포되었다. 사찰령 체제는 30본산 본사의 주지 임면권을 총독이 갖고 말사의 주지는 각 도 장관이 맡는 등 총독부에서 불교계의 인사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또 사찰 재산의 관리처분권을 당국이 갖는 방식이었다. 이때 한국불교의 종명은 『경국대전』의 선교양종에서 그대로 따와서 ‘조선불교 선교양종’으로 정했다. 사찰령에 의해 일본의 본말사 제도를 적용한 30본산제가 시행되었는데, 전국의 1,300여 사찰을 30본산에 배정하고 본사에서 말사를 관리하게 했다. 1911년 11월 이후 30본산 본말사의 주지가 인가되었고, 1912년부터는 각 본산에서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승인을 얻었다.
30본산은 경기도 광주 봉은사(奉恩寺)·양주 봉선사(奉先寺)·수원 용주사(龍珠寺)·강화 전등사(傳燈寺), 충청도 보은 법주사(法住寺)·공주 마곡사(麻谷寺), 전라도 전주 위봉사(威鳳寺)·금산 보석사(寶石寺)·장성 백양사(白羊寺)·순천 송광사(松廣寺)·순천 선암사(仙巖寺)·해남 대흥사(大興寺), 경상도 문경 김룡사(金龍寺)·의성 고운사(孤雲寺)·영천 은해사(銀海寺)·달성 동화사(桐華寺)·경주 기림사(祇林寺)·합천 해인사(海印寺)·양산 통도사(通度寺)·동래 범어사(梵魚寺),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평창 월정사(月精寺), (북한) 강원도 고성 유점사(楡岾寺), 함경도 안변 석왕사(釋王寺)·함흥 귀주사(歸州寺), 황해도 신천 패엽사(貝葉寺)·황주 성불사(成佛寺), 평안도 평양 영명사(永明寺)·평원 법흥사(法興寺)·향산 보현사(普賢寺)이다. 전라도 구례 화엄사(華嚴寺)는 선암사의 말사로 지정되었는데 법맥 계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속 거부하며 본산 승격을 요구했고, 결국 1924년 11월 20일에 본산으로 승인되면서 31본산으로 확대되었다.
사찰령과 본말사 제도는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의 중요한 축이었고, 불교계는 정치권력이 놓은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사찰령 시행 당시 교단 상층부에서는 비판보다는 오히려 제도화된 불교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사회화·대중화를 통한 불교 중흥을 기대했다. 하지만 점차 종교의 정치적 종속이 가속화되었고, 1930년대 후반 이후에는 국민 총동원과 국체 수호에 불교계 주류가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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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寺刹을三十大本山今에華嚴寺를加入하야三十一大本山으로되얏다으로하고住持一人을各置하야翌年爲始하야三十本寺가各其本末寺法을制定하야朝鮮總督의認可를受하얏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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