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만일염불회 |
|---|---|
| 한자 | 萬日念佛會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삼문, 염불문, 연담 유일, 건봉사 |
| 시대 | 18세기 이후 |
| 관련장소 | 건봉사, 신계사, 미황사, 태안사, 범어사, 통도사 |
| 관련인물 | 편양 언기, 진허 팔관, 연담 유일, 범해 각안, 만화 원준 |
만일 동안 매일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을 하는 신앙 법회로 19세기 이후 특히 성행
염불은 오랜 전통을 지닌 불교신앙으로 서방 극락정토로의 왕생을 기원하며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신앙 행위이다. 조선 후기에는 선의 경절문(徑截門), 교인 원돈문(圓頓門)과 함께 수행의 하나로서 염불을 하는 염불문(念佛門)이 삼문(三門) 체계를 형성했다. 삼문을 처음 제시한 것은 청허 휴정(淸虛休靜)이었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은 휴정의 제자 편양 언기(鞭羊彦機)였다. 그는 염불문에 대해 “서방정토를 떠올리는 염불법으로 자신의 마음이 부처이며 자신의 본성이 바로 아미타”라고 기술했다.
18세기 후반 진허 팔관(振虛捌關)의 『삼문직지(三門直指)』(1769)에는 “경절문, 원돈문, 염불문의 삼문을 통해 심성을 바로 깨닫고 법계(法界)에 증득하여 들어가며 정토에 왕생한다. 삼문은 비록 각기 다르지만 그 요체는 같다.”라고 하여 삼문의 근원적 일치를 강조했다. 특히 염불문은 수행과 신앙의 대상을 널리 확보할 수 있었고, 염불을 통한 깨달음과 정토로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당시 교학의 대가였던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은 염불문을 자심정토(自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의 선정자력문(禪定自力門)이라고 규정하여, 염불선(念佛禪)의 수행 위주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염불신앙의 수요에 부응하여 염불회인 연지만일회(蓮池萬日會)를 개설했다. 유일의 문손인 범해 각안(梵海覺岸)은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무량회(無量會)에서 “아미타불을 협시하는 대세지(大勢至)보살은 염불로 사람을 접하고 관음(觀音)보살은 참선으로 대중을 가르치니 염불과 참선은 두 개의 다른 이치가 아니다.”라고 하여 참선과 염불의 일치, 수행과 신앙의 결합을 통한 염불정토의 통합적 길을 추구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세기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만일염불회가 세 차례나 열리면서 전국적 유행의 불씨를 지폈다. 건봉사는 통일신라시대인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 화상이 만일염불회를 연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관련 설화의 전승이 이곳에서 만일회가 개최된 밑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봉사 만일회는 1801년, 1851년, 1881년에 개설되었는데 각각 만일, 연한으로는 27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앞의 두 번은 서방 극락정토로 왕생하기 위한 염불신앙이 주요 목적이었다면, 만화 원준(萬化寬俊)이 주도한 1881년의 만일회는 염불문 수행으로서 유심정토(唯心淨土)의 성격이 강했다.
19세기에는 건봉사를 시작으로 강원도 신계사(神溪寺), 전라도 미황사(美黃寺)·태안사(泰安寺), 경상도 통도사(通度寺)·범어사(梵魚寺) 등 전국적으로 만일염불회가 퍼져나갔다. 이 무렵에 나온 대표적 정토 가사인 「권왕가(勸往歌)」는 염불 수행을 할 때 경계해야 할 열 가지 악업(惡業)을 소개하고, 정토왕생의 요체를 제시하여 만일염불회 등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염불문의 성립 이후 수행과 함께 신앙으로서 염불의 문호가 크게 넓혀졌다. 정토 관련 서적의 빈번한 간행과 문학작품의 유통, 염불계의 결성, 만일염불회의 조직 등에서 정토로의 길이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었음을 볼 수 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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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에 거주하는 영월 대사(暎月大師)는 행업이 정련(精鍊)하고 학식이 심박(深博)한데, 불법 교화의 운세가 비색(否塞)하고 중생이 고단함을 생각하여 이 암자에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를 만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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