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동리산문 |
|---|---|
| 한자 | 桐裏山門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태안사, 옥룡사, 적인선사 혜철, 광자대사 윤다 |
| 시대 | 통일신라~고려시대 |
| 공간 | 전라남도 곡성 동리산 |
| 관련장소 | 태안사(泰安寺), 옥룡사(玉龍寺) |
| 관련인물 |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惠哲), 광자대사 윤다(廣慈大師 允多),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
신라하대 적인선사 혜철이 전라남도 태안사에서 개창한 선종 산문
신라하대 적인선사 혜철(785~861)이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개창한 산문이다. 태안사를 개창한 혜철은 경주 출신으로 출가 후 부석사에서 화엄을 공부하였다. 814년(헌덕왕 6) 당으로 유학을 떠나 서당 지장(西堂智藏)에게서 선을 배운 뒤 839년(신무왕 원년) 귀국하였다. 처음에는 무주(전남 화순) 쌍봉사에 머물렀으나 842년 무렵 곡성 태안사로 옮겨와 동리산문을 개창하였고, 무주 지역의 지방 세력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다. 한편, 혜철은 문성왕(文聖王)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우대도 받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한 문성왕의 질문에 봉사(封事)를 올리는 등 입적할 때까지 왕실과 경주 귀족들이 혜철을 존경했다고 전한다. 왕실에서는 혜철의 요청대로 태안사 사방 밖에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는 태안사가 소유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 준 것으로, 이러한 지원으로 신라하대 동리산문은 서남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혜철이 입적한 뒤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을 계승하였고, 이어 윤다(允多)가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으며 나말여초 동리산문은 더욱 성장하였다. 입적 후 왕명으로 태안사에 건립된 혜철과 윤다의 승탑과 탑비는 나말여초 동리산문의 위상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서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광양 옥룡사(玉龍寺)를 거점으로 활동한 계열도 있었다. 당에 유학을 다녀와 견훤의 후원을 받다 고려 태조에게 귀의, 고려시대 태조·혜종·정종의 귀의를 받았던 동진대사 경보(洞眞大師 慶甫, 868~948)가 대표적인 선승이다.
동리산문은 고려시대 구산선문이 정립되면서 구산문 중 하나에 포함되었으나, 고려시대에 두드러진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다만, 고려 중기 작성된 「백계산 옥룡사 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이나 「태안사형지안(泰安寺形止案)」을 통해 고려 중기 동리산문의 흔적을 추정할 수 있다.
동리산문이 시작된 태안사에는 동리산문의 개산조인 적인선사 혜철의 탑비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872년 건립)와 승탑, 혜철에서 그의 제자에게 전해진 법맥을 이어받은 광자대사 윤다의 탑비 「태안사 광자대사탑비」와 승탑이 남아 있다.
· 집필자 : 강호선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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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桐裏山太安寺寂忍禪師(惠哲國師)碑陰에記載되야잇는寺有財產目錄에依하면當時의佛香畓寺奴婢其他寺有柴塲(나무갓)荳原地(沈醬原料를供給하는土地即今의俗語로醬太사래)鹽盆地(염밧)等의名目이甚히昭詳分明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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