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기신재 |
|---|---|
| 한자 | 忌晨齋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수륙재, 장의사, 진관사, 회암사, 흥천사 |
| 시대 | 고려~조선 전기 |
| 관련장소 | 대자암, 장의사, 정인사, 진관사, 회암사, 흥복사, 흥천사 |
기일에 조상의 명복을 빌며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는 불교식 재회
기신재는 부모를 비롯한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忌日)에 사찰에서 추모하며 지내는 불교식 재회(齋會)이다. 고려시대에는 망자의 명복을 빌며 지내는 추선(追善) 의례로 왕실에서 주로 행했다. 성종 때 사례에는 분수(焚修), 기월(忌月) 등 중국의 기신재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후 봉선고(奉先庫)를 설치해 비용을 대거나 관료들의 상표위무(上表慰撫)나 식찬공헌(食饌供獻) 및 반승(飯僧) 등의 형식에서 고려 왕실만의 고유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려 말에는 귀족 및 고위 관료층까지도 기신재를 관습적으로 행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국왕의 4대조까지 선왕 선후의 기일에 기신재를 지냈다. 사후 1년이 되는 기일의 재회는 소상재(小祥齋), 2년째는 대상재(大祥齋)라고 하는데, 실록에 나오는 기신재의 사례를 일부 소개해 본다. 1398년(태조 7)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대상재가 흥천사(興天寺)와 흥복사(興福寺) 두 곳에서 열렸고, 1470년(성종 1) 예종의 소상재가 정인사(正因寺)에서 시행되었다. 선왕 및 선후의 초재(初齋)와 기신재는 장의사(藏義寺)·대자암(大慈庵)·진관사(津寬寺)·회암사(檜巖寺) 등 왕실에서 그때그때 지정한 여러 사찰에서 지냈다. 예를 들어 세종 연간에 선왕의 기신재는 내자시(內資寺)에 맡겨 장의사에서, 선후의 기신재는 내섬시(內贍寺)가 담당하여 진관사에서 지냈다.
기신재 때는 국왕이 소(疏)와 향(香)과 축문을 내리고 왕자와 신하들을 사찰에 보냈다. 대상재의 경우 비용을 내자시·내섬시와 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예빈시(禮賓寺) 등에서 부담했고 대군과 승지, 예조의 당상관 등이 참여했다. 의식절차는 먼저 기일 전날 저녁에 주관하는 승려가 선왕 선후의 혼령을 불러들이는 의식을 행하고 신주(神主)를 모셨다. 기일에는 선왕과 선후의 신주를 욕실에서 깨끗이 닦은 뒤 흰색 평상 위에 신주를 놓고 옆문을 통하여 불상 앞으로 옮겨 세운다. 이때 바닥에는 흰색의 지의(地衣)를 깔며 승려들이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신주를 맞이한다. 그러고는 신주가 불상에 예불하는 형태로 소문(疏文)을 읽고 명복을 빌었다. 그 후 제사를 거행하고 승려 등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飯僧) 행사를 했다.
기신재는 선왕 선후에 대한 ‘효’를 사후까지 실천하는 의례였고, 역대 조종(祖宗)이 남긴 제도라고 하여 왕실에서 매우 중시되었다. 세종 대에는 왕실 기신재가 수륙재와 통합되어 국가 의례로서 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사림이 활동한 중종 때에 이르러 1516년(중종 11) 빈번한 혁파 상소가 이어지며 결국 폐지되었다. 명종 대인 1550년 문정왕후가 선종과 교종의 양종을 재건하고 기신재도 재개되었지만, 1565년 왕후 사후 다시 중단되었다. 이후 불교적 색채의 기신재는 왕실 의례로서 더는 설행되지 않았고, 원묘(原廟)인 문소전(文昭殿) 등에서 지내는 유교적 기신제(忌晨祭)가 이어졌다. 임진왜란으로 문소전이 소실된 뒤에는 왕릉이나 원묘(園墓)에서 유교식 기신제를 지냈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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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佛日出思之似久 而亘萬古而常今 吾杞天崩念之如昨 而過廾載而已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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