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국행의례 |
|---|---|
| 한자 | 國行儀禮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수륙재, 기신재, 진관사 |
| 시대 | 고려 후기∼조선 전기 |
| 관련장소 | 견암사(見巖寺), 관음굴(觀音窟), 삼화사(三和寺), 진관사(津寬寺) |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한 의례로 조선시대의 유일한 불교 국행의례는 수륙재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한 대표적 불교의례는 수륙재(水陸齋)였다. 물과 뭍의 모든 중생과 혼령, 귀신의 고통을 구제하고 선왕과 선후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는 고려 전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이래 14세기에 국행(國行) 혹은 왕실의 내행(內行) 의례로 설행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 때 국가 차원에서 행해지던 불교 행사가 대부분 폐지되었지만 수륙재는 국행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조선 태조는 죽임을 당한 고려 왕족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1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성행하는 국행의례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1394년(태조 3)에 삼척·강화·거제에서 공양왕 일가를 비롯한 왕씨들을 대대적으로 처형한 뒤, 1395년 삼척의 삼화사(三和寺), 개성의 관음굴(觀音窟), 거제의 견암사(見巖寺)에서 이들의 천도를 기원하는 수륙재를 실시하게 했다. 1397년에는 나라의 안정과 민생을 기원하기 위해 수륙재를 확대 실시했고, 수륙재의 상설화를 위해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또한 수륙재가 열리는 사찰에는 그 비용 마련을 위해 면세지인 위전(位田)으로 수륙전(水陸田)이 지급되었다. 예를 들어 세종 대인 1424년 선교양종의 승정 체제로 바뀌었을 때 관음굴과 진관사에는 원래 있던 토지 외에 수륙위전 100결씩이 추가로 더해졌다.
한편 태종 대에 명의 『홍무예제(洪武禮制)』가 수용되면서 불운하게 죽었거나 제사 지낼 후손이 없는 이들을 위한 여제(厲祭)가 정비되기 시작했다. 세종 대에는 5례(五禮) 중심으로 국가의례가 정비되면서 수륙재는 여제와 본격적인 경쟁을 해야 했다. 한편 왕실 기신재(忌晨齋)가 수륙재로 통합되면서 왕실의 조상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식 상제례로서 그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비록 나라의 사전(祀典)에는 들지 못했지만 성종 대에 나온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불교의례 가운데 유일하게 수록되었다.
조선 전기 수륙재는 망자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였을 뿐 아니라 재해와 질병 등을 극복하는 기양(祈??)의례로도 행해졌다. 수륙재는 비록 선교양종이 폐지된 중종 대 이후 국행의례로서는 중단되었지만 왕실 차원에서는 계속 행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수륙재가 대중적 성격의 불교의례로 변모했고 관련 의식집의 편찬과 간행이 늘어났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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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天子。至於庶人。追遠報本之禮。皆以祭祀蒸嘗爲名。浮屠者。奉佛招魂之事。擧以水陸爲名。何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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