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풍수지리설 |
|---|---|
| 한자 | 風水地理說 |
| 유형 | 역사 |
| 키워드 | 도선, 비보사탑, 훈요십조 |
| 시대 | 통일신라∼조선 |
| 관련장소 | 옥룡사(玉龍寺) |
| 관련인물 | 도선(道詵) |
산과 땅, 강의 형세와 기운에 따라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학설
풍수지리설은 도성·사찰·가옥·분묘 등을 조성할 때 땅과 물의 형세와 기운을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길흉과 화복이 그에 달려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이나 참위설(讖緯說)과 연결되며 시작되었고,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이론적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들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통일신라 말이었다.
9세기에 중국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선종과 함께 풍수지리설이 수용되었는데, 특히 선승들은 중국과 신라에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산수 지리에 대한 직관과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 풍수지리의 개조로 추앙되는 도선(道詵, 827∼898)은 중국에는 가지 않았지만 전라도 광양 옥룡사(玉龍寺)를 근거지로 하면서 전국을 탐방했다. 도선은 사찰과 탑이 국토의 풍수지리적 안정을 보장한다는 비보사탑(裨補寺塔)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각 지역의 균형적 발전을 매개로 나라의 안녕을 추구한 것이었다. 이에 지방의 권력자들은 선승을 후원하면서 풍수지리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최치원(崔致遠)이 쓴 「숭복사(崇福寺) 비문」에는 왕릉의 장지(葬地)와 사찰을 지맥에 의해 살핀다는 내용이 나와서 9세기 후반에 이미 신라에 풍수지리설이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선은 당시 큰 명성을 떨쳤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친 왕륭(王隆)에게 산수와 천문을 보니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왕건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한편 도선이 당나라 풍수지리의 대가인 밀교 승려 일행(一行)에게 배웠다고 전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에도 도선이 산천의 형세를 점쳐서 정한 자리에 지은 절 외에는 창건을 금지하고 있다. 이처럼 사찰이 위치한 곳의 지덕과 국운을 연결한 비보사탑설은 도선의 명성을 등에 업고 풍수지리의 대표 상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고려의 개경과 조선의 한양을 국도로 정하는 데도 풍수지리설이 큰 영향을 미쳤다.
· 집필자 : 김용태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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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代에至하야는王太祖가三韓을統合하고佛法을崇信하야名山勝地에五百多數에達하는裨補寺刹(地德에應하야建設한寺刹을裨補라謂함)을建設하고此에田民을多給하얏고後王의代代로此를增加하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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