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현장 |
|---|---|
| 한자 | 玄奘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대자은사, 삼장법사, 역경, 구법 |
| 시대 | 당(唐) |
| 출생 | 602년 추정 |
| 입적 | 664년 |
| 시호 | 대변각법사(大遍覺法師) |
| 주요주석처 | 홍복사(弘福寺), 대자은사(大慈恩寺), 옥화궁(玉華宮) |
| 탑소재지 | 탑-중국 자은사 현장탑, 흥교사 사리탑 |
당나라 때 최고의 역경승
당나라 때 활동한 구법승(求法僧)이자 역경승(譯經僧)으로, 태종(太宗) 때 대규모의 역경 사업을 주도하였다.
성은 진(陳)씨이고, 이름은 위(褘)이다. 602년(혹은 598년, 600년)경 낙양(洛陽: 지금의 허난성 뤄양)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출가한 형 장첩(長捷)을 따라 낙양 정토사(淨土寺)에 머무르며 11세 때 형에게서 『유마경』과 『법화경』을 배웠고, 13세에 출가하였다. 이후 『열반경』·『섭대승론(攝大乘論)』·『아비담론(阿毗曇論)』·『잡심론(雜心論)』·『성실론(成實論)』·『구사론(俱舍論)』 등을 배웠고, 625년 장안(長安)에 이르러 지론학(地論學)과 섭론학(攝論學)의 대립을 목도했다. 629년(혹은 627년)경 유식(唯識)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 혼자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서역을 지나 중인도 나란다(那爛陀, nālandā) 사원에 도착한 때는 633년경이다. 당시 나란다 사원은 인도불교의 중심지이자 최고의 교육기관이었고 계현(戒賢, śīlabhadra, ?~?)을 수장으로 승려 수천 명이 운집해 있었다. 계현이 현장에게 유학 목적을 묻자 현장은 “스승에 의지해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배우러 왔습니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나란다에 머물며 『유가사지론』·『섭대승론』 등의 유식학 논서뿐만 아니라 『중론(中論)』·『백론(百論)』 등의 중관학(中觀學) 논서들도 익혔으며, 강의를 맡기도 하고 논변대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641년경 귀국길에 올라 645년 장안에 도착하였다. 부처님의 사리 150과, 금은 불상 7구, 산스크리트어 불전 520권 657부와 함께였고, 당나라 태종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7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장안에 온 현장은 태종의 칙명으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을 집필하는 한편, 직접 태종에게 역경 사업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황제의 전폭적 지원 아래 국가적 차원에서 대규모 역경 사업이 시작되었다. 현장은 전국에서 대소승의 교설에 정통한 승려들을 모집하여 증의(證義), 철문(綴文), 증범어범문(證梵語梵文), 자학(字學), 윤문(潤文) 등 각각 역할을 세분화하여 분업하는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홍복사(弘福寺)를 시작으로 대자은사(大慈恩寺)를 거쳐 664년 옥화궁(玉華宮)에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대소승 경론을 번역하는 데 매진하였다. 번역된 경론은 모두 75부 1,335권에 이르는데, 대표적으로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해심밀경(解深密經)』·『유가사지론』·『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순정리론(順正理論)』·『구사론』·『성유식론(成唯識論)』·『변중변론(辯中邊論)』·『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대반야경(大般若經)』 등이다. 후에 현장의 제자 규기(窺基, 632~682)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의 개조가 되었으나, 현장 그 자신은 유식학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를 개창할 의도가 없었으며, 원전 번역을 통해 불교의 정확한 내용을 중국에 알리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과 함께 중국 2대 역경가로 평가받으며, 의역을 한 구마라집과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전자의 역서를 구역(舊譯), 후자의 역서를 신역(新譯)이라 칭하기도 한다.
· 집필자 : 정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