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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한글지의
한자智顗
유형인물
키워드천태종, 천태산, 천태삼대부, 천태오소부
시대남북조 말기 진(陳)~수(隋)
출생538
입적597
천태(天台), 지자(智者)
주요주석처천태산
탑소재지지자탑원(智者塔園): 현재 천태산 위쪽 진각강사(眞覺講寺)에 그의 육신을 모신 육신보탑[또는 진신보탑(眞身寶塔)]이 있다. 탑은 6각 3층으로 되어 있으며, 탑신의 벽면에 그의 전기가 새겨져 있다.
중국 천태종의 개창조
중국 천태종의 실질적인 개창조이다. [『불조통기(佛祖統紀)』에서는 중국 천태종의 17조사(祖師)를 열거하면서, 용수를 고조(高祖), 혜문(慧文)을 제2조, 혜사(慧思)를 제3조, 지의를 제4조로 기록하고 있다.] 지자대사(智者大師) 또는 천태대사(天台大師)라고도 한다. 생몰 연대는 538~597. 자(字)는 덕안(德安)이고, 속성은 진(陳)이다. 대대로 영천(潁川) 사람인데 진(晉)나라 때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형주(荊州) 화용현(華容縣)에 머물렀다. 7세 때부터 절에 가기를 좋아하였는데, 스님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입으로 전해 주니 듣고서 곧 외워 지녔다. 18세에 과원사(果願寺)에 주석하던 법서(法緖)를 의지하여 출가한 다음,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율과 방등(方等)을 익힌 뒤, 대현산(大賢山)으로 가서 『법화경(法華經)』·『무량의경(無量義經)』·『보현관경(普賢觀經)』의 법화삼부경을 외워 20일 만에 모두 통하였다. 23세(560)에는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에 머물던 남악 혜사(南嶽慧思, 515~577)를 찾아가 법을 구하였다. 그때 혜사 선사는 지의에게 “옛날 영취산에서 함께 법화를 들었는데, 숙세의 인연을 따라 지금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구나.”라면서, 곧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어 보이고 사안락행(四安樂行)을 설해 주었다. 그로부터 밤낮으로 정진하여 2·7일이 지나도록 『법화경』을 외우다 「약왕보살본사품(藥王普薩本事品)」의 “이것이 참된 정진이며, 이것을 참된 법으로 여래를 공양함이라 한다.(是眞精進, 是名眞法供養如來)”라는 곳에 이르러 몸과 마음이 활짝 트이면서 선정에 들었다. 이에 혜사는 “그대가 아니면 증득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으리라. 그대가 들어간 선정은 법화삼매의 전방편(前方便)이고, 발현한 총지는 초선다라니(初旋陀羅尼)이다. 그대는 법을 설하는 사람 가운데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인가하며, 그로부터 지의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강설하도록 하였다. 30세(567)에는 혜사의 부촉을 받아 진(陳)나라 수도 금릉(金陵)으로 나아가 선법을 펴기 시작하여, 32세(569)에는 와관사(瓦官寺)에 머무르며 『법화경』의 제목을 강설하였다. 이어서 『법화경』의 대의를 풀이하거나,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차제선문(次第禪門)』 등을 강설하고, 또 『육묘문(六妙門)』을 펴내기도 하였다. 38세가 되던 해(575)에는 따르는 대중은 늘어도 법을 얻는 사람은 점차 줄어드는 현실을 탄식하며, 20명의 승려들과 함께 천태산으로 들어가서 불롱봉(佛隴峰)에 터를 잡고 함께 정진하였다. 그 후 8년이 지난 어느 날, 홀로 북쪽의 화정봉(華頂峰)에서 두타행을 닦던 중, 깊은 밤에 마군(魔軍)을 조복하고 일실제(一實諦)의 큰 깨달음을 얻으니, 이것을 화정개오(華頂開悟)라고 한다. 48세(585) 되는 해에, 왕이 지의에게 수도로 돌아와 큰 법을 베풀도록 하라는 조칙을 보내어, 지의는 마침내 천태산을 나와 금릉으로 나아가 광택사에 머물렀다. 50세(587)에 광택사에서 『법화경』을 강설하였는데, 이때 제자인 장안 관정(章安灌頂, 561~632)이 함께하였다. 장안이 훗날 그 강설 내용을 정리한 것이 『법화문구(法華文句)』이다. 54세(591) 때, 진왕 광(晉王廣)의 간곡한 청으로 그에게 보살계(菩薩戒)를 주니, 진왕은 지자(智者)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그 후 지의는 고향인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玉泉寺)를 건립하고, 56세(593)에 그곳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를 강설하고, 이듬해(594)에는 『법화경』에 의거한 원돈지관(圓頓止觀)의 실천법인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설하였다. 58세(595)에는 진왕의 거듭된 요청으로 직접 지은 『유마경소(維摩經疏)』 첫째 권을 왕에게 전하고, 나머지 부분을 계속 저술하였다. 60세(597) 때 산을 나서다 석성사(石城寺) 대불(大佛) 앞에서 입적하였다.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대중에게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외우도록 하였다. “바라제목차가 너희들의 스승이고, 내가 항상 사종삼매를 말했으니, 이것이 너희들을 밝게 이끌어 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수 개황 17년 11월 24일에 입적하니, 세수는 60세, 법랍은 40년이었다. 그의 업을 전한 제자[傳業學士]는 32명이며, 선을 익힌 제자들[習禪學士]은 강한(江漢)에 흩어져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의 사상은 『법화경』과 용수의 『중론』, 『대지도론』 등에 크게 의거하고 있다. 특히 『법화경』의 경문에 대한 그의 해설인 『법화문구』, 경의 제목 해석을 비롯한 법화의 심오한 사상을 강설한 『법화현의』, 법화의 원융 사상에 의거한 실천법을 설한 『마하지관』의 세 저술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법화경』 주석서 중 가장 대표적이고 주요한 강설이므로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라고 부른다. 또한 이 세 저술은 그의 불교 사상과 실천의 면모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에, 이것을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라고도 칭한다. 그리고 『관음현의』, 『관음의소』, 『금광명경현의』, 『금광명경문구』, 『관무량수불경소』를 천태오소부(天台五小部)라고 한다. 이후, 그의 불교 이해와 실천이 ‘천태종’이라는 하나의 종파[一宗]로 확립되면서, 천태삼대부는 그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또한 천태오소부는 법화참법·금광명참법·관음참법·미타참법 등 천태교단에서 행해진 신행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도 대표적인 저술에 『석선바라밀차제법문』, 『법화삼매참의』, 『육묘문』, 『수습지관좌선법요』, 『법계차제초문』, 『각의삼매』, 『유마경현소』, 『유마경문소』, 『사교의』, 『관심론』 등이 있으며, 현존하는 저술은 총 46부 188권에 이른다. 지의는 남북조 말기 양(梁)·진(陳)으로부터 수(隋)대의 통일 시기에 이르는 난세에 천태불교를 구성하여 ‘가장 정통적인 불교’, ‘가장 중국적인 불교’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지의를 인도의 석가세존과 용수존자 이후에 정통 불교를 계승한 대성자(大聖者)로 평가하며 ‘동쪽 땅의 석가[東土迦文]’, 즉 ‘중국의 석가’라 부르고 있다.
· 집필자 : 오지연

용례

  • 우(右) 모(某)는 머리를 조아리고 귀명하며 천태교주이신 지자(智者) 대사에게 아룁니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는 오시팔교(五時八敎)의 교판(敎判)으로 동쪽에 전해진 한 시대의 성언(聖言)을 분명히 해석하여 미진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후세에 불교를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를 말미암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조(吾祖) 화엄소주(華嚴疏主)께서도, 현수(賢首)의 오교(五敎)는 천태(天台)와 대략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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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자료

  • 천태불교학
    도서 이영자 | 서울: 해조음 | 2006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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