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의정 |
|---|---|
| 한자 | 義淨 |
| 유형 | 인물 |
| 키워드 | 법현, 현장, 금광명최승왕경, 남해기귀내법전, 대당서역구법고승전 |
| 시대 | 당(唐) |
| 출생 | 635 |
| 입적 | 713 |
| 주요주석처 | 불수기사(佛授記寺), 대복선사(大福先寺), 서명사(西明寺), 대천복사(大薦福寺) |
7세기에 활약한 중국의 구법승
중국의 구법승이자 역경승이다. 635년 제주(齊州: 현 중국 산둥성) 산장(山莊)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범양(范陽: 현 허베이성) 출신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장(張)씨, 자(字)는 문명(文明)이다. 7세에 출가하여 21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출가 후 널리 불교 전적을 연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계율 연구에 힘을 쏟았다. 645년 현장(玄奘, 602~664)이 천축(天竺: 인도)에서 귀국하자 현장과 법현(法顯, 338~420)의 구법 여행을 동경하였고, 이때부터 인도 구법 여행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
671년(37세) 의정은 그토록 염원하던 인도로 출발한다. 번우(番禺: 현 중국 광둥성)에서 페르시아 상인의 배에 올라 해로(海路)로 인도로 향했다. 본래 도반 수십 명과 출발할 예정이었지만, 승선할 때 모두 떠나고 혼자서 여정에 올랐다. 실리불서(室利弗逝: 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를 거쳐 동인도 탐마립저(耽摩立底)에 도착하였고, 이후 녹야원과 기원림 등 불교의 성지를 순례하며 당시 불교 교육의 중심지였던 나란타사(那爛陀寺)로 향했다.
나란타사에 도착한 후 11년간 머물며 범서와 범어를 익히고 보사자(寶獅子) 등 저명한 스승들에게서 『유가론(瑜伽論)』, 『중관론(中觀論)』, 『인명론(因明論)』, 『구사론(俱舍論)』 등을 배웠다. 또한 그의 역경 목록에 상당수의 계율·밀교 관련 전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란타사에서 계율과 밀교 역시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685년 의정은 귀국길에 오른다. 귀로는 인도에 갈 때의 행로와 같았다. 동인도의 탐마립저에서 해로로 출발하여 실리불서를 거쳐 695년에 낙양에 도착하였다. 귀국할 때 범본 경률론 400부, 금강좌, 사리 300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후 의정은 불수기사(佛授記寺), 대복선사(大福先寺), 서명사(西明寺), 대천복사(大薦福寺) 등에 머물며 입적할 때까지 역경에 매진하였다.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공작왕경(孔雀王經)』 등 56부 230권의 전적을 번역하였고,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 5부 9권의 저서를 남겼다.
의정은 이전의 역경가들에 비해 밀교 관련 경전을 다수 번역하였고, 설일체유부에 전승된 율장을 번역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또 그의 역경 작업에서 주목되는 점은, 번역문 사이사이에 범어의 음이나 뜻, 인도의 문물제도, 중요한 사료 등을 기록한 간주(間註)를 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정 이전의 역경가 가운데 이렇게 주석을 병행하는 치밀한 번역 작업을 시도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가된다. 중국 4대 역경가에 포함되며,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삼장(三藏)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25년간 의정이 들렀던 국가는 30여 개국에 달한다. 그가 저술한 『남해기귀내법전』,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등에는 7세기 후반 인도불교의 상황과 동남아시아에 관한 많은 중요한 기록이 담겨 있다. 이 기록들은 7세기 후반의 인도 교통로와 인도불교 정세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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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러 법사들은 나 의정과 모두 책상을 마주하고 친숙하게 지냈다. 나는 그들의 심오한 말들을 받아먹었는데, 듣지 못했던 것을 새로 알게 된 것이 반가웠고 일찍이 얻어 예전에 해득한 것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게 되니, 등불을 전하는 한 가닥 바람을 생각하면서 실로 아침에 도를 듣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의문에서 먼지를 말끔히 없애니 저녁에 죽더라도 기꺼이 따르리라. 영취산에서 남은 구슬을 줍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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