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정화운동 |
|---|---|
| 한자 | 淨化運動 |
| 유형 | 용어 |
| 키워드 | 비구, 대처, 대한불교조계종 |
1954년 5월부터 1962년 4월까지 진행된 한국불교 전통 회복운동
일제강점기 왜색불교의 유입으로 대처(帶妻) 등의 폐해가 생기자, 광복 이후 이를 극복하고자 일어난 승풍 회복운동이다.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맺어지면서 부산이 개항되었고, 이 무렵부터 정토진종(淨土眞宗) 등 일본불교의 대표 종파들이 조선에 들어온다. 그로 인해 180여 개의 사원과 포교소가 개설되기도 한다. 1895년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를 해제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을 반포해 본·말사 제도를 확립하고 사찰 주지 임명권과 재산관리권을 총독부에 일임하는 등 불교계를 통제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자연스레 일본불교계와 같은 대처 불교가 조선에도 자리 잡는다. 1950년대 비구승과 대처승의 인원 통계를 보면, 전자가 500여 명, 후자가 7천여 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그리고 국내 1천여 개의 사찰 가운데 비구승이 100여 개를 점유했고, 대처승이 900여 개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요인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은 사찰에서 나가라’라는 유시(諭示)를 내리면서 승단 내부에서도 비구승을 중심으로 하려는 운동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비구 측과 대처 측 사이에도 갈등이 깊어진다. 이후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 정화 운동 역시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군부정권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불교계의 분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비구·대처 양측이 합의한 불교재건비상종회가 개최되었고, 새로운 종헌이 통과되면서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기에 이른다.
정화운동을 통해 비구 승단의 정통성을 확인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전통이 승가의 청정성에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뿐만 아니라 종단의 이념을 확립함으로써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우고, 사회적 역할이 증대될 수 있도록 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또한 이때 사찰과 문화재를 보수·정비하는 등 여러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