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법무아 |
|---|---|
| 한자 | 法無我 |
| 산스크리트어 | dharma-nairātmya |
| 유형 | 용어 |
| 키워드 | 법아견, 팔불, 공성, 연기, 인무아, 법무아 |
아비달마불교에서 주장한 아공법유를 비판하는 대승불교의 아공법공의 해석
아비달마불교에서 주장한 아공법유(我空法有)를 비판하는 대승불교의 아공법공(我空法空)의 해석이다. 아비달마불교는 찰나법연기(刹那法緣起)설을 통해 무아(無我, anattan)를 설명한다. 찰나법연기는 자성(自性, svabhāva)을 지니며, 찰나적으로 생멸(生滅)하는 법이 인(因, hetu) 혹은 연(緣, paccaya)을 통해 상속(相續, santāna)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상주론(常住論)과 단멸론(斷滅論)을 중(中, majjha)의 입장에서 거부하고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를 말했는데, 아비달마불교에서는 찰나법이 생멸하기 때문에 상주론이 아니고, 인연상속하기 때문에 단멸론이 아닌 중의 입장에서 일체의 현상을 법들의 인연상속으로 설명한 연기라고 파악한다. 찰나법연기설에서는 오온(五蘊, pañcakkhanda)을 법들의 화합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아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없다는 방식으로 무아설을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을 아공법유의 관점이라고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오온이 무아이면서 동시에 그 법의 특성에는 자성이 없다고 해석한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 속에서 생(生)·주(住)·이(異)·멸(滅)의 사상(四相)을 지닌 법의 자성을 주장한다. 용수(龍樹, Nāgārjuna)는 『중론(中論, Madhyamaka-śāstra)』에서 법의 특성이 불생(不生)・불멸(不滅), 불상(不常)・부단(不斷), 불일(不一)・불이(不異), 불래(不來)・불거(不去)이기 때문에 법자성이 성립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용수의 입장에서 법자성의 주장은 형이상학적 원리에 관한 집착이고, 그 집착은 또 다른 방식의 자아관이 될 수 있다. 『중론』은 법의 자성이 없음, 즉 공성(空性, śūnyatā)임을 드러내고 연기의 의미를 회복하고자 한다. 『중론』의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에서 연기는 스스로 인식된 내용을 갈애로 취착하고 존재화함으로써 그 존재화의 구조로부터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관한 설명이다. 법무아는 아공법공으로서 무아를 설명한 것이다. 유식불교에서는 무아를 인무아(人無我)‧법무아(法無我)로 구분하고, 각각 번뇌장(煩惱障)‧소지장(所知障)과 연계하여 설명한다.
· 집필자 : 우동필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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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아견(法我見)이란 근기가 둔한 이승(二乘)을 대상으로 하신 설법이다. 여래께서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하셨는데, 그것이 궁극의 설이 아니므로 이승은 오음법(五陰法)에 생멸이 있음을 보고는 생멸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내서 망령되게 열반을 집착한다. 이러한 집착은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은 자성이 생하는 일이 없으므로 멸하는 일도 없다. 본래가 열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망령된 집착을 완전히 떠난 자는 염법(染法)과 정법(淨法)이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서 자상(自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체법은 본래부터 색법도 아니고 심법도 아니다. 지(智)도 아니고 식(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결코 말을 통해 설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설을 시설하는 이유는 여래께서 훌륭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려서 중생을 이끌어 주시기 위한 것일 뿐, 그 취지는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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