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중도 |
|---|---|
| 한자 | 中道 |
| 산스크리트어 | madhyamā-pratipad |
| 팔리어 | majjhimā-paṭipadā |
| 티베트어 | dbu-ma’i-lam |
| 유형 | 용어 |
| 키워드 | 고락중도, 유무중도, 일이중도, 단상중도 |
① 고행이나 쾌락의 양극단을 넘어서 수행자를 열반으로 인도하는 팔정도(八正道) ② 중도, 즉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비유비무(非有非無), 불상부단(不常不斷) 등과 같은 진실
사성제, 삼법인, 연기 등과 함께 초기불교의 중심 사상으로서 불교를 인도의 다른 사상과 구분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도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먼저 설해진 것은 고락(苦樂)중도인데 이는 『율장(律藏)』 「대품(大品)」에서 발견된다. 요컨대 출가 수행자들은 쾌락에 탐닉하거나 고행에 몰두하는 양극단에 친근해서는 안 된다. 여래는 그런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깨달았는데, 그것이 바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구성되어 있는 팔정도라는 것이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고락중도 외에도 유무(有無)중도, 일이(一二)중도, 단상(斷常)중도 등이 발견되는데, 「캇차야나곳타경(Kaccāyanagotta-sutta)」(SN 12:15)에서 발견되는 유무중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세간의 사람들은 대체로 존재(=有)와 비존재(=無)라는 두 가지에 의존한다. 그러나 여러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여실하고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 수행자는 세간의 여러 사물을 비존재라거나 존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러 사물이 진실한 존재라면 소멸할 수 없을 것이고, 진실한 비존재라면 발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아첼라캇사파경(Acelakassapa-sutta)」(SN 12:17)에서 발견되는 일이중도와 단상중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고통을 자작자수(自作自受: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라고 주장하면, 고통을 짓는 자와 고통을 경험하는 자가 동일한 것이 되어서 상주론이 된다. 반대로 고통을 타작타수(他作他受: 남이 짓고 남이 받는 것)라고 주장하면, 고통을 짓는 자와 고통을 경험하는 자가 다른 것이 되어서 단멸론이 된다. 그러나 사실 악업을 지은 어제의 나와 고통을 경험하는 오늘의 나는 완전히 동일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고통은 자작자수도 아니고 타작타수도 아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로서 연기하는 사물은 상주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부파불교의 여러 학파들은 불타의 중도설을 고락중도와 단상중도를 중심으로 이해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타가 설한 중도설 가운데 고락중도(=팔정도)는 계정혜의 삼학(三學)으로 계승하였고, 유무중도는 단상중도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무중도를 단상중도 속에 포함시켰던 이유는 여러 법의 실체적 존재를 승인하는 그들의 법유론은 유무중도를 올바르게 설명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파불교의 법유론은 불타의 유무중도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단상중도도 불타의 중도설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는 말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불타는 「아첼라캇사파경」에서 원인과 결과의 불일불이(不一不異)를 통해서 원인과 결과의 불상부단(不常不斷)을 설명하였지만,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학설에서 원인과 결과는 동일성과 상이성이라는 양 극단으로 귀착되어 결국 상주론과 단멸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중관학파의 개조인 용수(龍樹, Nāgārjuna, 150년~250년경)는 『중송(中頌)』을 저술하여 불타의 중도설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중송』의 의미는 ‘중도에 대하여 논한 게송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중송』 제24장에서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우리들은 부른다. 그것은 가명(假名)이며,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라고 말하여, 중도를 연기, 공, 가명의 개념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중송』에서는 유무중도, 일이중도와 단상중도도 불타의 가르침과 거의 동일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는 『중송』 제15장에서 “부처님은 능히 유와 무를 소멸하신다. 가전연을 교화하시는 경전에서 ‘유도 떠나고 무도 떠나라’고 설한 것과 같다.”라고 말하여 유무중도를 언급하고 있으며, 『중송』 제20장에서는 “결과와 원인이 동일하다면, 낳는 것과 낳아지는 것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결과와 원인이 다르다면, 원인과 비원인(非原因)이 같은 것이 될 것이다.”라고 설하고, 나아가 『중송』 제18장에서는 “연해서 존재하는 것, 그 (결과)는 그 (원인)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용수는 『중송』의 귀경게에서 “불멸이고 불생인, 부단이고 불상인, 불일이고 불이인, 불래이고 불거인, 희론이 적멸하여 길상(吉祥)인 연기를 설해 주신 정각자, 여러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그에게 예배합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게송의 의미는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서 불생불멸이고 불상부단 등인 여러 사물의 진실을 설해 주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삼론종(三論宗)에서는 여기서 발견되는 불생불멸 등을 생멸, 단상 등의 극단을 떠난 중도라고 해석하여 이것을 팔부중도라고 불렀다.
유식학파도 중도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중관학파와 유사하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은 중관학파와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유식학파는 중관학파와 달리 능취(能取), 소취(所取)의 비존재와 아뢰야식, 진여(眞如)의 존재를 통해서 비유비무의 중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집필자 : 남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