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정혜쌍수 |
|---|---|
| 한자 | 定慧雙修 |
| 유형 | 용어 |
| 키워드 | 지관쌍수, 보조지눌, 수선결사, 성적등지문, 돈오점수설 |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뜻으로, 불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치우치지 않은 수행이 필요하다는 사상
정(定)은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 三昧)의 번역으로서 주로 지(止, ⓢśamatha)를 닦아서 얻어지는 결과이며, 혜(慧)는 주로 관(觀, ⓢvipaśyanā)을 닦아서 체득되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정혜쌍수란 바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선정을 닦을 때 지나 관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를 균등히 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로서, 지관쌍수(止觀雙修), 지관쌍운(止觀雙運)과 같은 의미이다. 『열반경』 「사자후보살품(師子吼菩薩品)」에서 석존은 “십주보살은 지혜력이 많고 삼매력이 적어서 불성을 밝게 볼 수 없고, 성문·연각은 삼매력은 많으나 지혜력이 적어서 불성을 볼 수 없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정과 혜가 동등하므로 불성을 밝게 보신다.”라고 하여(T12, 792c3-15)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사마타(지)는 일체의 번뇌를 없애는 작용 등이 있으므로 정(定)의 모습이고, 비파사나(관)는 정견(正見), 요견(了見) 내지 혜(慧)라고 부른다고 하여 지-정, 관-혜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원효 역시 『기신론소(起信論疏)』 권2에서 지와 관이 쌍으로 운용될 때 정관(正觀)이라 하면서 모습[相]을 따라 논하면 정은 지, 혜는 관이라고 부른다고 해설하고 있다(T44, 222a9-15). 그 밖에 혜원(慧遠)의 『대승의장(大乘義章)』, 관정(灌頂)의 『열반경소(涅槃經疏)』, 양분(良賁)의 『인왕경소(仁王經疏)』,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 등 수나라와 당나라 때 활동했던 여러 조사들의 저술에서도 정혜쌍수를 강조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은 수선결사(修禪結社, 修禪社)를 조직하여 불교 수행 운동을 펼치면서 정혜쌍수를 기치로 내세웠다. 수선결사는 고려 중기부터 개경 중심의 귀족불교가 세속화·형식화로 흘러가자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수행과 신앙을 정립하기 위하여 결성된 혁신적인 신앙 운동이었다. 지눌은 1190년(명종 20)에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동지를 모아 법회를 열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반포하여 결사를 이루고, 정혜사(定慧社)라고 이름하였다. 1200년에는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갔다. 1205년 길상사를 중창한 후 절의 명칭을 수선사(修禪寺)로 바꾸고, 정혜사를 수선사(修禪社)로 개칭하였다.
수선결사는 불교 수행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인 정과 혜를 한쪽에 치우침 없이 함께 닦도록[雙修] 한 실천 운동이었다. 그는 『수심결(修心訣)』에서 “정은 체이고 혜는 용이다. 체에 상즉한 용이므로 혜는 정과 뗄 수 없고, 용에 상즉한 체이므로 정은 혜와 뗄 수 없다.”면서(H68 711c15-17) 정과 혜가 함께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인간의 심성에는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수상정혜(隨相定慧)가 있으며, 수행은 모든 사람에게 내재한 자성정혜를 발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정혜쌍수의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이다. 여기서 돈오는 인간의 본심을 깨달아 보면 제불(諸佛)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이고, 비록 돈오를 해도 번뇌와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되는 것이 아니므로 점진적 수행[漸修]이라는 종교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지눌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의 법을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화엄 사상을 도입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세우고 화엄과 선(禪)이 근본에 있어서는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지눌은 화엄종의 전통에서도 회통적인 성격을 지닌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 나타나는 화엄종의 종교적 수행을 뒷받침하는 이론과 선불교의 수행이론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그는 화엄교학의 성기설(性起說)이 ‘마음이 바로 부처[心卽是佛]’라고 하는 선종의 근본 가르침과 같음을 보였으며,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중생과 부처는 동체(同體)이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상(相)과 용(用)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지눌의 사상은 당시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과 선종의 갈등을 교리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불교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
· 집필자 : 오지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