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 | 승병 |
|---|---|
| 한자 | 僧兵 |
| 유형 | 용어 |
| 키워드 | 취도, 승역, 의승 |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승려들로 조직된 군대
승군(僧軍)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출가자가 살생의 도구인 무기를 지니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승려가 군인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승단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한 형태의 승병, 혹은 국가나 승단이 속한 지역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형태의 승병의 존재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에서는 북위(北魏) 때 장안(長安) 지역에 승병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명나라 때에는 승병이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승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무열왕 때 실제사(實際寺)에 도옥(道玉)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백제가 쳐들어오자 승복을 벗고 이름을 취도(驟徒)라고 바꾼 후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전사하였다.”라고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승병이 조직화되어 대외적으로는 항마군(降魔軍)이라는 이름으로 거란과 몽골군에 맞서 싸웠고, 대내적으로는 묘청의 난, 이의방의 난 등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승려 자체의 군사 조직을 만들 수 없었다. 다만 도첩이 없는 승려를 환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승군을 조직하였다. 즉 도첩이 없는 승려를 성곽이나 요새를 구축하는 노역에 동원한 뒤 그 호패(號牌)를 지급하고 신분을 보장한 뒤 환속시켜 군인으로 만들었다.
승군의 활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휴정(休靜)이 전국 사찰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자, 전국 각지에서 승병들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승병장으로 영규(靈圭), 처영(處英), 사명(四溟)을 비롯하여 법견(法堅), 행사(行思), 영주(靈珠), 인준(引俊), 견우(見牛), 해안(海眼) 등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 등의 승군이 활약하였다.
병자호란 후에 승군은 산성의 수축과 수호에 주력하였는데 대표적인 곳이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다. 1624년 벽암 각성(碧巖覺性)을 도총섭에 임명하여 승도를 이끌고 남한산성을 수축하게 하였고, 산성 안 아홉 개의 절에 350명의 승군을 주둔시켰다.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쌓고, 산성 안 11개의 절에 승군을 두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호하기 위해 1년에 여섯 차례씩 승군을 상번하게 하고 각 절에는 수승(首僧)과 승장(僧將)을 두었다.
· 집필자 : 신행문화팀
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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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허 대사는 모든 지역의 승병을 총섭(摠攝)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았으나, 노쇠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는 대사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대사가 마침내 대중을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을 따르며 중국 장수와 협동하여, 이듬해 정월에 평양을 깨뜨리고 행장(行長)을 달아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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