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倭亂) 이후 경주 지역 불교사원의 재건(再建)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대규모 침략전쟁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사원건축이 전소되고 주변의 자연환경도 크게 손상되었다. 17세기 100여 년 동안 진행된 사원건축의 재건 공사는 기본 시설로서의 불전과 요사채를 갖추는 한편 주변 경관을 재생시키는 데 중점이 두어졌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 유서깊은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 온 불교사원이 전란 이전의 모습대로 복원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국가경제가 피폐하고 더불어 사원경제도 아주 어려운 사정에 있었으며, 건물을 짓는 데 절대적인 재료의 확보 또한 어려웠기 때문에 기본 시설을 갖추는 데 만족하는 선에서 재건 공사가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정조대에 이르면 사원 안에 재건된 건물은 대폭 증가하였고, 이에 따른 배치 질서의 변모가 이루어졌다. 신앙내용의 변화에 따라 17세기 당시에 이미 새롭게 설계된 불전 형식이 18세기에 그대로 계승, 유행됨과 아울러, 새로운 신앙의 유행에 따른 새로운 유형의 건물을 건립하는 공사 또한 이루어졌다. 그런 가운데 불국사는 통일신라 시대 이래의 기하학적 공간구성을 재건한 일례이다(그림1).
그림1. 불국사 배치도 ⓒ『불국사 복원공사보고서 』
경주 지역의 불교 사찰 대부분이 왜군을 무찌르는 최전선에서 의승군(義僧軍)의 본거지로 활용되었다. 그 결과 나라를 구하기는 했지만 사찰은 왜군의 보복으로 방화 후 소실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 뒤 사원 재건 공사가 전국적으로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경주 지역의 사찰 가운데 신라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확인된 곳은 200여 곳에 이른다.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 법등을 유지해 온 절은 불과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석굴암은 왜란의 피해를 입지 않은 듯 잘 보존되어 왔으나 불국사, 기림사(祇林寺, 그림2), 분황사(芬皇寺, 그림3), 백률사(栢栗寺, 그림4) 등은 승병을 조직해 항전한 결과 왜병의 표적이 된 탓에 그들의 방화로 약탈·전소되고 말았다. 17~18세기 200년 동안 꾸준히 재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 사찰들도 오늘날까지 명맥(命脈)을 이어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거동사(巨洞寺), 법광사(法廣寺), 심원사(深源寺), 안국사(安國寺), 원원사(願遠寺), 장천사(障川寺), 장흥사(長興寺), 정혜사(定惠寺), 천룡사(天龍寺) 등 10개 사원은 임진왜란때 전소된 뒤 재건되어 적어도 18세기까지 존속했지만, 지금은 폐허화된 채 터만 남아 있다. 19세기 이후 사원 경제를 유지하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증거이다.
전후 불국사 재건과 배치형식의 특수성
8세기의 창건 이래 800년 이상을 지속하며 변화, 발전해 온 불국사가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군들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된 것은 한국문화사상 가장 가슴 아픈 일 중의 하나이며, 건축사적으로도 석굴암과 함께 통일신라 절정기의 건축술을 보여 줄 대작을 잃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국사도 여느 사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에 왜구의 방화로 2,000여 칸에 이르던 사원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1604년 관음전 중건을 시작으로 하여 60여 년이 지난 뒤인 1659년에 대웅전이 건립됨으로써 재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웅전, 극락전, 설법전 등이 주축을 이루는 중심 일곽과 이를 남쪽에서만 보호하는 남회랑을 비롯하여, 나한전, 승사(僧舍)인 만월당과 현진당 그리고 종각, 경루 등 기본 시설이 재건되었다. 1660년 이후에도 비로전, 조사전, 문수전 등의 불전이 새로이 건립되었고, 동행랑(東行廊), 중행랑(中行廊) 등 복도 시설이 보완되었다. 또 수미범종루(須彌梵鍾樓)가 중창되었다.
한편, 17세기 전반에 재건된 건물에 대한 보수 공사가 많이 시행되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 하에서 서둘러 재건한 결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건물의 결함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웅전도 1730년(영조 6)에 이르면 비가 새서 개와를 다시 입히고 단청을 다시 하는 등 보수의 손길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울러 여러 전각에 대한 개와 불사도 이때 진행되었다. 활암동은(活庵東隱)이 1740년(영조 16) 『고금창기(古今創記)』를 쓴 것도 이때에 와서 불국사의 재건이 일단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00여 년간의 중창 공사로도 원래의 가람 구조를 제대로 복원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1729년에 도승(道僧) 태인(太仁)이 호남으로부터 와서 보고
“절의 규모가 서역의 불국을 모방하기는 하였으나 깨끗하고 더러운 곳, 성스러운 곳과 범속한 곳을 구별하지 않아서 질서를 잃었다고 개탄하면서 3곳의 요사채를 경루(經樓) 밑으로 옮겼다”
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 요사를 불전 구역에 잘못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 태인은 1749년에 광명당선실(光明堂禪室)을 중건하고, 1765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였다. 이때 그는 호남승(湖南僧) 18인을 불러 모아 영남승(嶺南僧) 10여 명과 함께 대웅전 중창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이때 명부전(冥府殿, 1759), 적광전(寂光殿, 1768), 자하문(紫霞門, 1781) 등이 함께 중창되었고, 불국사는 비로소 옛 모습을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국사의 배치 형식과 전각 구성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18세기 불교사원 중에서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재건되고 18세기에 보완, 완성되어 간 사원건축은 대부분 산사(山寺)였기에 불국사와 같은 기하학적 공간구성이 아니라, 통도사에서처럼 사람의 동선과 주관적 시각상(視覺像)을 고려한 유기적인 배치형식을 택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불국사의 재건
『고금창기』에는 1729년에 요사채를 옮긴 태인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1740년 이후의 사실은 후인에 의해서 첨가된 것인데, 1805년에 비로전 가는 길을 보수한 내용을 맨 끝에 싣고 있다. 그런데 후보된 내용에는 1749년 광목당선실 중건, 1750년 극락전 중수, 1758년 적광전 중창, 1759년 명부전 중창, 1765~1769년 대웅전 중창 및 존상 개금, 탱화 조성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편, 1968년에 삼산오악조사단(三山五岳調査團)이 조사한 「불국사대웅전중창단확기(佛國寺大雄殿重創丹臒記)」(1767)와 「불국사자하문중창기(佛國寺紫霞門重創記)」(1781)는 이 시기 불국사 재건 공사의 성격을 살피는 데 지극히 귀중한 사료이다. 1765년 2월에 시작하여 같은 해 7월에 대웅전 건물이 완성되었다. 2년 뒤 1767년에 5월부터 6월에 걸쳐 단청을 하고 나서 「단청기」를 남겼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활산(活山)의 병든 늙은이라고 하였으며 기문 뒤에는 중창도화사(重創都化士)가 도태(道泰), 단청도화사(丹靑都化士)가 찬홍(贊弘)임을 맨 먼저 적고 나서, 단청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 인근 사원의 부조 내역, 인근 동네의 부조 내역 등을 차례로 열거하였다.
대웅전 중창을 이끈 18명의 호남승 가운데 이름을 밝혀 적은 4명의 승려 중 쾌연(快演)만이 화엄사 승려로 확인된다. 그는 화엄사 대웅전과 각황전, 불갑사 대웅전 등을 중수할 때 도편수로 활약하여 뛰어난 건물을 남겼다. 부조를 한 사원은 32곳인데 경주, 연일, 울산, 양산, 대구, 동래 등지의 가까운 사원이다. 시주를 한 마을은 우박, 배반, 평리, 하석지, 상석지, 조간, 동방동, 구어, 인왕, 천군리, 하서지, 난원 등 경주에서도 불국사에 비교적 가까운 마을들이다. 시주자로 참여한 관인(官人)은 경주부윤 홍상공(洪相公)과 장기현감 홍모서(洪某庶)이다. 고을의 책임자는 재목이나 석재의 채취를 허락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
불국사 불전의 특징
불국사 대웅전(그림5)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평면을 가진 건물로 현존하는 18세기 불전 가운데 예외적인 평면구성을 보여 준다. 18세기의 불전은 모두 단층 불전으로서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정면*측면이 5칸*5칸인 불전은 불국사 대웅전 한 채뿐이다. 내진 중앙부에 세워야 할 고주 8개 중 6개를 생략하고 2개만을 측면 어칸 중간선에 배열함으로써 3칸*3칸이나 되는 대규모의 내진과 예불공간을 확보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또 대웅전 정면은 어칸:협칸=2:1로 설계되었고 이러한 비례가 극락전과 비로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지만, 현존하는 고려말 이래의 불전에서는 이러한 주칸 설정을 한 예는 하나도 없다.
주칸 20칸 중에서 측면의 협칸과 퇴칸 그리고 배면의 협칸 등 10칸을 제외하고 나머지 10칸은 창호로 개방되어 있다. 창호는 정면 어칸이 4짝 소슬빗꽃살문, 좌우 협칸 및 퇴칸이 2짝 빗살문이며, 측면 어칸이 3짝 띠살문, 배면 어칸이 4짝(1짝/2짝/1짝) 정자살문, 퇴칸이 2짝 정자살문 등으로 되어 있어서 18세기의 일반적인 추세를 잘 따르고 있다. 한편 안팎 벽체는 대부분 빈 벽으로 남아 있는데, 다만 내부(그림6) 오른쪽 벽 좌우 협칸에만 탱화를 봉안하고 불단을 설치했을 뿐이다.


그림5. 불국사 대웅전 전경 ⓒ불교학술원 그림6. 불국사 대웅전 내부 ⓒ이강근
불국사 극락전(그림7)은 협칸에 비하여 어칸을 넓게 잡아 입면상 적절한 비례를 얻은 동시에 구조적인 보강을 위하여 정면 어칸에 가는 기둥 2개, 배면 어칸에 가는 기둥 1개를 더 세웠다. 내진에는 전후에 4개의 고주를 모두 세웠는데 이는 전면 고주를 생략하여 넓은 예불공간을 확보하려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지 않고, 원래의 주초 배열을 지키려고 한 결과이다. 그 결과 예불 공간은 앞뒤 고주 사이에 걸쳐 놓은 창방 위에 벽체마저 가설함으로써 더욱 내밀하고 폐쇄적으로 되었다(그림8). 또 좌우 측면을 모두 벽체로 만들고 배면에도 작은 크기의 문만 내는 등 감실형 불전으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기단이나 주춧돌 등 통일신라시대의 유구에 맞추어 재건하는 과정에서 생긴 예외적인 형식이다.
불국사 대웅전 불단은 정면 5칸 건물의 규모에 맞추어 3칸 규모로 마련되었다. 목조 불단은 석조 불단 위에 올려져 있는데(그림9), 이 석조 불단은 마루 위로 일부만 돌출되어 있는 바, 면석과 갑석을 한 돌로 만들되 갑석 하부를 크고 작은 2개의 호형 모울딩으로 처리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목조 불단은 다리 모양 하대, 저(低)-고(高) 2단으로 된 중대(모두 어의동자기둥으로 면 분할하되 아래 칸에는 꽃무늬, 위 칸에는 범자무늬를 그려 넣음), 공양탁자 역할의 상대, 상대 윗면에 한 단 높게 설치한 불상 봉안대, 다시 그 위 앞쪽에 존상 하부를 가리기 위하여 설치한 보탁(補卓)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불국사 극락전 불단(그림10)은 예외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제작된 것이다.
불국사 대웅전은 18세기 불전 가운데서도 지극 정성으로 장엄을 추구한 불전이다. 측면이 5칸인 탓에 4개나 설치된 충량은 용(龍) 2, 백상(白像) 1, 사자 1 등으로 조각되어 있고, 심지어는 고주 윗몸에까지 업경대를 등에 업은 사자상을 설치하였다.(그림11) 여기에 더하여 내부 공포의 살미는 모두 연꽃이나 연봉으로 처리되고 살미 맨 위의 한대는 봉두로 조각되는 등 장식화되었다. 외부 공포의 살미는 아랫 몸에 연봉을 장식한 채 하강 곡선을 그리며 길게 뻗어 나와 있으며 맨 위 한대는 용두나 봉두로 조각되었다. 불전 안팎을 이처럼 화려하게 연화당초나 용봉 모티프를 입체적으로 조각하여 정치(精緻)한 단청의 윤곽선 안에 배치, 장엄하는 경향은 불국사 대웅전과 불국사 극락전(그림12)이 모두 당시의 유행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림11. 불국사 대웅전 내부 장엄 조각 ⓒ이강근 그림12. 불국사 극락전 내부 장엄 조각 ⓒ이강근
· 집필자 : 이강근( 전 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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