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신라 건축사에서 불국사 건축의 의의

6~7세기 신라 불교건축의 전개
신라 건축사에서 6세기는 불교의 국가 공인에 뒤이어 흥륜사(興輪寺), 황룡사(皇龍寺) 등 거대 사찰을 창건한 놀라운 시기이다. 황룡사(그림1)를 발굴조사한 결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창건 가람이 삼금당(三金堂) 사원으로 변경된 때는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때이며, 여기에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이 9층목탑을 더 세우면서 7세기 중반에 중건 가람이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보다 앞서 완성된 분황사(芬皇寺)의 창건 가람은 탑의 후면에 삼금당을 품자형(品字形)으로 배치한 형식임이 발굴조사 결과 확인되기도 하였다(그림2).
그림1. 경주 황룡사지 발굴 이후 사역 조감 ⓒ국립문화재연구소편, 『황룡사지출토유물목록집』 도7 [좌] 그림2. 경주 분황사 동편 발굴(2010년 11월) ⓒ이강근 [우]
신라 건축사에서 7세기는 매우 중요하고 역동적인 변화들로 가득 차 있다. 7세기 전반기의 건축 가운데 첨성대(瞻星臺)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 분황사 불탑은 최고의 모전석탑이라는 의의가 있으며, 지금은 터와 기초부만 남아 있지만 황룡사에 세워졌던 9층 목탑은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이 세운 건물로 이름이 나 있다. 이러한 건축들은 모두 선덕여왕의 건설 활동의 결과로 백제와의 전쟁이 계속되던 국난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7세기 중반에 벌어진 삼국 전쟁으로 인하여 수십 년간 위축되었던 건설 활동이 재개된 것은 7세기 후반 그것도 4/4분기에 가서이다. 나당(羅唐) 전쟁의 와중에 국난 극복을 위하여 창건된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망덕사(望德寺),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왜적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으로 세우기 시작하여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 초기에 완공된 감은사(感恩寺)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월성(月城) 동남쪽에 새로운 궁궐인 동궁(東宮)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나정 터에 신궁(神宮)을 중건하는 등 도성을 재편한 것도 이 시기이므로 7세기 4/4분기에는 대규모 건설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천왕사(그림3)와 감은사(그림4)는 불과 몇 년 간격을 두고 창건된 사찰로 쌍탑을 갖춘 가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천왕사 불탑은 목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데 반하여, 감은사 불탑은 새로운 양식의 석탑으로 조성되었다. 사천왕사의 배치는 동서 폭이 남북 깊이보다 작은 (동서:남북=82m:88m=1:1.07) 반면, 감은사는 동서 폭이 남북 깊이보다 크다.(동서:남북=76m:74m=1:0.97) 이렇듯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조영계획상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황룡사와 분황사가 도성 중심지의 이방(里坊) 속에 자리잡은 탓에 멀리서 우뚝 솟은 탑을 바라볼 수 있게 조영된 데 대하여,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전면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구릉지에 층단형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입지와 경관에 변화를 보인다. 그런데 쌍탑 가람은 앞 시기의 가람에 비하여 규모면에서 상당히 축소되어 있으며, 신라 불교건축사 안에서도 그러한 축소 현상이 현저하다. 감은사지 발굴과 두 탑의 해체 수리를 통하여 건물지 조성 방식, 기단이나 계단의 구조, 석탑의 내부 적심과 석조 구조물의 구축 방법이 확인되었다. 금당지 북쪽 기단에서는 계단과 기단이 맞물리는 위치에 처음으로 탱주석을 세우고, 면석을 지대석 윗면에서 약간 안쪽으로 물려 쌓는 기법이 확인되었다(그림5). 석탑 상층기단에서는 탱주와 면석을 맞물리는 기법이, 1층 탑신에서는 우주와 면석을 조립하는 기법이 확인되었다. 감은사 금당지와 석탑에서 확인된 석조 건축술은 8세기 석조 건축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는데, 불국사 불전들의 기단이나 석가탑, 심지어 토함산 석굴의 석실 구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5. 경주 감은사지 금당 북편 계단 소맷돌 구성 ⓒ『감은사발굴조사보고서』, 1997 [좌] 그림6. 경주 사천왕사지 금당터 기단과 계단의 구성(2008년 12월 10일) ⓒ이강근 [우]
한편 사천왕사 발굴로 새롭게 확인된 금당 내부의 존상배치법, 좌우 익랑, 탑지 기단토 구축법, 가구식 기단의 독특한 구성, 지대석·면석·갑석의 맞물림 기법, 소맷돌의 맞춤 기법 등(그림6)은 황룡사지 기단과 계단이 감은사지 기단으로 계승되는 중간 단계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라 건축술의 계승과 발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이다. 이 시기 불교사원의 금당 평면형식은 황룡사지 중금당(그림7)의 내외진2중(內外陣二重) 형식과 사천왕사지 금당(그림8)의 단실(單室) 형식으로 구별되지만, 내진부 내부에 다양한 존상을 가득 배치한 것만은 공통된 특징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국사나 토함산 석굴의 존상배치에 황룡사나 사천왕사 금당의 존상배치가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림7. 경주 황룡사지 중금당 내진부 벽체 기초 다짐석 노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좌] 그림8. 경주 사천왕사지 금당터 발굴(2008년 12월 10일) ⓒ이강근 [우]
8세기 신라 불교건축의 전개
신라 중대 왕권의 안정과 번영에 힘입어 8세기 신라건축은 질적으로 발전하였다. 다만 7세기 후반의 전후 재건 사업이 수십 년간 진행된 뒤이므로 8세기 전반에는 수도 서라벌에서는 새로운 건축의 조영이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문헌 사료에는 성덕왕 16년(717)에 ‘신궁(新宮)’을 창건하였다거나 경덕왕 3년(745) 7월에 동궁을 수리했다는 기사가 보일 뿐이며, 그밖에 감산사(甘山寺, 719년)나 굴불사(掘佛寺, 750년경)가 창건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하는 게 고작이다. 8세기 후반으로 가면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13년(754)에 황룡사 대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황룡사에 종각과 경루를 지은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듬해인 755년(경덕왕 14)에는 분황사 약사상을 새로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분황사에 중금당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760년(경덕왕 19) 2월에는 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에 월정교와 일정교라는 큰 규모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배모양 기초를 가진 교각이나 쐐기돌을 사용한 교대 등 물의 저항을 견디는 석조건축을 처음으로 조영하였다. 여기서 쐐기돌은 7세기 후반 장창지(長倉址)에서처럼 대규모 창고 건물의 기단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용되거나 감은사지 전면 선착장처럼 물과 접하는 축대에 사용했던 특수 구조 요소이다. 쐐기돌 기법은 경덕왕대 석조건축 공사에 재등장하여 불국사 청운교 아래 석축(그림9), 극락전 전면과 서면 축대 나아가 토함산 석굴 천정(그림10)에도 활용되었다. 구조재인 동시에 미적 요소로 사용된 쐐기돌의 변용은 이 시기에 절정에 다다른 석조건축술을 보여 준다.
불국사의 건축사적 의의
8세기 후반에 대규모로 신축된 불교건축이 바로 불국사 가람과 토함산 석굴이다. 불국사의 목조건물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고, 전면의 대석축과 종각의 수미산 석주, 대웅전·극락전·비로전·관음전·강당 등의 기단부와 발굴 유구 그리고 석탑 2기 등이 남아서 그 시기 석조건축술의 발달된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준다. 대석축은 거대한 자연 암석과 반듯하게 치석된 석재를 다양한 기법으로 자유자재로 결구(結構)하여 『화엄경(華嚴經)』에 등장하는 불국토(佛國土)의 보궁(寶宮)에 어울리는 축대로 탄생되었다. 청운교·백운교 밑의 아치 구조는 연속 아치를 뼈대로 삼아 결구한 반원통형 볼트로서 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구조물이며, 연화교·칠보교 밑의 호형 상판석은 토함산 석굴 연도 위의 호형 천장석과 궤를 같이 하는 구조물이다.
그림11. 불국사 비로전 남쪽 계단 소맷돌(2008년 11월 11일) ⓒ이강근 그림12. 불국사 극락전 남쪽 계단 소맷돌(2008년 11월 11일) ⓒ이강근
불전 건물의 기단은 대부분 탱주를 모각한 판형 석재를 면석으로 삼아 지대석 안쪽에 밀어넣어 쌓는 구조로 되어 있다. 비로전지 소맷돌(그림11)이 지대석·면석(3각형)·갑석으로 조립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극락전의 소맷돌(그림12)을 비롯하여, 무설전, 관음전 등은 모두 한 개의 통돌로 되어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한편 석가탑의 부재 구성을 보면 상층기단에서 탱주를 생략한 점, 1층 탑신석을 통돌로 만든 점에서 감은사 석탑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석탑에서의 이러한 변화를 보면 8세기에는 구성부재수를 줄여 축조 과정을 간략화하면서도 구조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석조건축술이 발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불국사에서 볼 수 있는 석조건축상의 이러한 특징은 토함산 석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집필자 : 이강근( 전 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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