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불국사는 경덕왕 때 재상을 지낸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한편 불국사 관련 가장 오래된 기록인 석가탑 안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중수문서(1024년 작성)에는 불국사가 742년(경덕왕 원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혜공왕(재위 765~780)대에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두 기록을 종합하면 불국사 건립은 최소 30년 이상 소요된 대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국사가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산지 지형을 활용해 사찰을 세우면서 대석단(大石壇)을 쌓아야 했고, 사찰의 규모도 매우 컸기 때문이다(그림 1, 2). 1740년에 편찬된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불국사의 규모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보이는데, 임진왜란의 피해를 입기 이전 불국사는 크고 작은 건물이 3천여 간(間)이나 되었고,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힌 건물만 해도 60여 동(棟)이 넘는다.
그러나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 선조 26년(1593) 5월, 왜군이 사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지장전(地藏殿)에서 숨겨둔 무기를 발견하자 “꽃은 아름답지만 속에 독충이 있다”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불국사고금창기』에 남아 있다. 이때 적병을 피해 장수사(長壽寺)에 숨어있던 담화대사(曇華大師)가 제자들을 이끌고 달려와서 불을 껐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당시 왜군의 방화로 인해 불국사의 건물 2,000여 간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나마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금동아미타불좌상>이 불길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담화대사 일행이 응급조치한 결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약 70년 동안 불국사 재건 공사가 이어졌지만 원래의 규모를 되찾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사진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건물조차 대부분 허물어지고 대웅전, 범영루, 자하문, 극락전, 안양문 정도만 남은 매우 쇠락한 모습이었다(그림 3). 현재 우리가 보는 불국사는 일제강점기의 일부 보수와 1970년대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거쳐 정비된 모습이다(그림 4).
신앙의 변화와 기존 불전(佛殿)의 재해석
창건 당시 불국사는 화엄종(華嚴宗) 사찰이었다. 이후 11세기에 작성된 석가탑 중수문서에는 '유가업불국사(瑜伽業佛國寺)'라고 기록하여 고려시대에 이르러 불국사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708년에 편찬된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의 '오백 개의 선종사찰(禪宗寺刹) 터 가운데 제일인 묘길방(妙吉坊)이 현재의 불국사이다.'라는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불국사는 선종이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국사는 창건 이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신앙을 수용하며 변화하는데, 이때 기존의 건축을 새로운 신앙에 맞게 재해석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석가탑과 다보탑은 고려시대 중수문서에는 각각 ‘서석탑(西石塔)’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한 ‘무구정광탑(無垢淨光塔)’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 탑은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의 내용으로 재해석하여 각각 ‘석가불이 항상 머물며 설법하는 탑’과 ‘다보불이 항상 머물며 설법을 증명하는 탑’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기록된 불국사 관음전(觀音殿)과 지장전(地藏殿) 영역은 마치 불교회화처럼 경전에 등장하는 요소를 건축으로 배치하여 흥미롭다. 관음전 영역으로 오르는 낙가교(洛迦橋)는 『화엄경』에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라고 알려진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을 상징하고, 입구인 해안문(海岸門)은 보타락가산이 있는 남쪽 바닷가를 상징한다(그림 5). 그리고 관음전 주위에 배치된 취죽루(翠竹樓), 녹양각(綠楊閣)은 각각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에 묘사되는 대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상징하는 건물로 해석된다(그림 6).
원과 원을 다리로 연결한 인드라망(因陀羅網, Indra’s Net)의 세계
사찰건축에서 회랑(回廊)으로 둘러싼 독립된 공간을 원(院)이라고 한다. 백제의 사찰 중에는 3개의 원으로 구성된 익산 미륵사(彌勒寺)가 있고, 원효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고선사(高仙寺)의 경우 금당과 탑을 원으로 구획한 사례가 있지만 불국사 이전에 건립된 신라사찰은 대부분 하나의 원으로 조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비교하여 불국사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 건립된 본격적인 산지사찰이자 여러 개의 원으로 구성된 다원식(多院式) 사찰이라는 의의가 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비로전(毘盧殿) 을 중심으로 대웅전, 극락전, 관음전, 지장전 영역 등 회랑을 두른 4개의 원이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표 1).
〈 표 1〉 『불국사고금창기』에 기록된 주요 불전
이처럼 불국사는 신라의 일반 사찰과 달리 여러 불·보살을 모신 다원식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부처님 나라(佛國)’를 뜻하는 사찰 이름도 이러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공교롭게도 불국사의 각 원에 봉안된 불·보살상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오대산(五臺山)의 다섯 봉오리에서 출현한 불·보살과 유사하여 화엄(華嚴)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모든 존재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를 제석천(帝釋天)의 그물에 비유하여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불국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사찰 구조에 반영하여, 독립된 원과 원을 ‘다리(橋)’로 연결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웅전 영역의 연화교·칠보교, 극락전 영역의 연화교·칠보교는 겉보기에는 계단이지만, 상징적으로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의 의미를 부여했다(그림 7, 8). 더구나 범영루(泛影樓)를 오르내리던 사다리에도 승천교(昇天橋)라는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불국사 건축에서 ‘다리’는 중요한 상징적 장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중심불전 | 부속건물 | 낭무(회랑) |
|---|---|---|
| 대웅전 | 석가탑, 다보탑, 좌·우경루, 수미범종각 | 동·서익무, 동·서장랑, 남행랑 |
| 극락전 | 없음 | 동·서장랑, 전후행랑 |
| 비로전 | 광학부도(현, 석조사리탑) | 없음 |
| 관음전 | 취죽루(翠竹樓), 녹양각(綠楊閣) | 동·서행랑, 남행랑 |
| 지장전 | 명경당(明鏡堂), 장석루(杖錫樓) | 동·서낭무 |


그림7. 대웅전 영역의 청운교·백운교 ©한정호 그림8. 극락전 영역의 연화교·칠보교 ©한정호
이밖에도 『불국사사적』에는 사성교(四聖橋)·사미교(沙彌橋)·반야교(般若橋)·도살교(到薩橋)와 육도윤회(六道輪回)를 상징하는 육도교(六道橋) 등 13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등장하는 다리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육도교’만큼은 위치가 분명한데, 지장전 영역에서 지옥을 상징하는 시왕전(十王殿)으로 이어지는 다리였으며, 구조는 여섯 칸으로 구획되었다고 기록하여 육도윤회를 상징화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국사는 불교 신앙과 세계관을 건축으로 구현한 사찰이다. 다섯 개의 중심 불전과 원으로 구성된 다원식 구조는 신라인들이 5만 불·보살의 진신(眞身)이 머무는 곳이라 여겼던 오대산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독립된 원을 연결하는 다리들은 깨달음의 단계와 인드라망 같은 화엄 사상을 상징한다. 이처럼 불국사는 불교적 상징체계가 건축과 공간에 집약된 독보적인 불교유산이다.
· 집필자 : 한정호(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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