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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조선시대 은해사는 학승(學僧)과 문인(文人)들이 교유하는 공간이었다. 특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친필 편액(篇額)이 다수 남아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편액은 일반적으로 건물의 이름을 걸어 놓는 표식이자 전각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왕가의 인물을 비롯하여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와 고승 등의 글씨가 주를 이룬다. 은해사의 혼허 지조(混虛智照) 스님이 1862년에 작성한 「은해사 중건기」와 1879년 이학래(李鶴來)가 쓴 「은해사 연혁변」의 내용을 통해서도 당시 은해사에 김정희의 편액이 남겨져 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현재 은해사와 은해사 백흥암에는 김정희 친필의 〈은해사(銀海寺)〉, 〈대웅전(大雄殿)〉, 〈불광(佛光)〉, <산해숭심(山海崇深)>, <보화루(寶華樓)> 등의 편액들이 소장되어 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에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하고, 추사체를 완성한 문신이자 학자이며 서화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이나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스님과 같은 고승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나눌 만큼 불교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인물이다. 특히 김정희는 「은해사 중건기」를 쓴 혼허 지조 스님과 깊은 교유가 있었다. 1847년(헌종 13) 은해사에 있었던 대규모의 화재로 인해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건물이 소실되며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활발한 중창 불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김정희는 1848년 12월 6일까지 제주도 유배 생활을 하였고, 1851년 7월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으므로 현재 남아있는 은해사의 편액들은 당시 중창 불사를 주도하던 혼허 지조 스님과의 인연으로 김정희가 65세인 1850년경에 써준 것으로 추정한다. 김정희가 쓴 은해사 편액의 글씨는 각각 다른 구성을 보여주며 추사체의 개성을 담고 있다. 〈불광〉과 〈대웅전〉 편액은 졸박하면서도 강건한 힘이 느껴지는 필획이며, 〈은해사〉 편액은 강필로 획의 겹치는 부분이 드러나도록 표현하였다. 은해사 편액들은 김정희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쓴 봉은사의 〈판전(板殿)〉(1856) 편액과 함께 추사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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