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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악화상 행장-인악집

『인악집(仁岳集)』은 인악 의첨(仁岳義沾, 1746~1796) 스님의 제자인 성안(聖岸, 생몰년 미상) 스님이 스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97년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서 편집 간행한 문집이다. 『인악집』의 서문은 평소 인악 의첨 스님과 편지를 주고 받던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썼으며, 발문은 대구 달서구 출신의 학자 우재악(禹載岳, 1734~1814)이 썼다. 이 문집은 총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악 의첨 스님은 1784년 은해사 운부암에 주석하였고, 그 무렵부터 은해사의 각종 불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 문집에 실린 10편의 기문(記文)은 당시 은해사와 같은 사찰의 중창 등과 관련된 내용을 전하고 있어 18세기 사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문집의 말미에는 성안 스님이 적은 「인악화상행장(仁嶽和上行狀)」이 있어 동화사 〈인악대사비(桐華寺仁嶽大師碑)〉(1808)와 함께 스님의 행적을 자세히 살피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인악화상행장」에 따르면 인악 의첨 스님은 고려의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이능일(李能一, 생몰년 미상)의 23세손으로 속성은 이씨(李氏), 호는 인악, 자는 자의(子宜)이다. 스님은 1746년 경상북도 달성군 인흥촌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을 통달하였는데, 18세에 용연사(龍淵寺)에서 스님들의 위엄있는 모습을 본 뒤, 출가를 결심하여 벽봉 화상(碧峯和尙, 생몰년 미상)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 스님→상봉 정원(霜峯淨源, 1627~1709) 스님으로 이어지는 문중에 속하게 되었으며 23세의 나이로 강당에 올라 설법하였다. 이후 스님은 비슬산, 팔공산, 황악산, 불영산, 계룡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수행하였고, 명성을 크게 떨쳐 1790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고 불상을 만들 때, 그 과정을 감독하는 증명법사(證明法師)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1796년 세수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하셨으며, 이때 사람들은 산중(山中)의 일이 끝났다고 말할 만큼 슬퍼하였다고 한다. 특히, 스님은 은해사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748년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은해사 충효암(忠孝菴)을 자암 화상(紫巖和尙, 생몰년 미상) 스님이 재건하자 「충효암 중창기(忠孝菴重創記)」를 지었다. 그리고 1786년 은해사 백흥암(百興巖) 영산전의 불상을 새로 만들고 보수한 내력을 기록한 「백흥암 영산전 소성불보살급나한제성상기(百興巖靈山殿塑成佛菩薩及羅漢諸聖像記)」을 지었다. 이뿐만 아니라 1787년 〈은해사 무오갑수공비(銀海寺戊午甲樹功碑)〉의 비문을 찬술하여 은해사에 많은 토지와 산림을 보시한 무오(戊午) 갑계(甲契)의 공적을 칭송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악집』에서 은해사와 관련된 기록이 다수 보인다는 것은 인악 의첨 스님이 일생에 걸쳐 은해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음을 알려준다.
원문
仁嶽和上行狀 和上諱義沾。字子宜。號仁嶽。高麗開國壁上功臣大匡司空星山府院君李公諱能一之二十三世孫也。英廟丙寅九月九日。生於達州仁興村。八歲入鄕學讀小學。深奧其旨。一聞則透百行。其 書三讀便誦。才聞及於鄰邑。非直才也人也尤奇。鄕人爭資之。惟恐不成。至十五讀盡詩書易。善屬文。爲時名下士噫。非天才豈能如是乎。十八歲與鄕谷諸子。就於龍淵寺肄業。見僧之濟濟 心忽有感。依嘉善軒公落紺。受戒具于碧峯和上。和上深器之。敎之以金剛楞嚴等經。而使之轉叅西嶽秋波聾巖等諸名師。益明其學。又以戊子春。再會於和上。受信具而登堂。時年二十三。 其派系則於臨濟三十四世。於西山八世。霜峯之五世孫也。一日曰。吾聞雪坡和上東國華嚴宗也。而未及進叅。是吾所憾。遂勢贄而往拜於靈源精舍。和上輙手而悅曰。吾亦欲與師久矣。何晩也。仍講雜華。八閱月而見終。繼之而禪頌。消融其査滓。旣而願爲禪弟。和上曰諾。且曰惟師珍重。當今之棟樑。後世之規矩。吾道其幸哉。歸而行化於瑟山公山鶴山龍山佛靈等諸山。而煩不能盡錄。師賦性混厚。動靜常見舒泰少無戚戚之容。見之者。莫不心悅而口誦。至於日用之篤實。誨人之不倦。雖比於古賢師可也。何者。夜而叅禪。就寢只一更而已。晝則說講。隨其高下諄諄告之。令易入而無未達之弊。甚之於俗儒之。以羲易來學者多。而亦無厭色也。是孰使之然歟。方今佛道寢微。世幾無學佛者。而諸路之欲磨鍊經旨。不謀同聚者。常百餘人。彷彿然靈山故跡。惜乎。其時之不遭也。若使生於全盛之時。化衆豈止今日而已哉。歲庚戌自朝家。新置龍珠寺。命造佛像。上曰擇選當世之名僧。以主厥事可矣。時師爲其證師。作佛腹藏願文。主上取而覽之。稱善不已曰。豈意釋而有能文者乎。乃以恩旨錫之。此則松雲碧庵以後。所未有之事。貴重當復何如。其後夢對天顏數矣詳見詩集。豈深感聖恩。無時敢忘而然歟。沒於聖上丙辰午月旬五日。報年五十一。法臘三十四。嗚呼。有如是之德。而如是其不壽也。豈天欲使吾道不 振耶。行路相謂曰。仁嶽師逝。山中已矣。夫甚者。至涕泣不能言。此其大略。至若寄歸之靈瑞異跡。不欲盡述。 弟子聖岸謹撰。
번역문
인악 화상 행장 화상의 휘는 의첨이고 자는 자의이고 호는 인악이다. 고려의 개국벽상공신 대광사공 성산부원군 이능일 공의 23세손이다. 영조 병인년 9월 9일에 달주 인흥촌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읽었는데 그 뜻을 깊이 이해하여 한번 들으면 백 가지 행실에 통하였고 그 책을 세 번 읽자 암송하여 재주와 명성이 인근 마을에 펴졌다. 재주뿐만이 아니라 사람됨이 더욱 기이하여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도와주었고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열다섯에 『시경』과 『서경』과 『주역』을 다 읽었고 글을 잘 지어 당시 명성이 선비들에게 펴졌다. 하늘이 내린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열여덟에 마을의 여러 자제들과 용연사에 나아가 학업을 익힐 때 승려들이 위의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갑자기 감동이 있었다. 가선헌 공에게 의지하여 출가하고 벽봉 화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화상이 그를 깊이 그릇으로 여겨 『금강경』과 『능엄경』으로 가르치고 하여금 서암·추파·농암 등 여러 유명한 스님을 차례로 참례하게 하여 더욱 그 학문을 밝히게 하였다. 또 무자년 봄에 화상을 다시 만나 가사와 바리때를 받고서 강당에 올랐으니 그때가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그 계파는 임제 선사의 34세손이고 서산 대사의 8세손이며 상봉 선사의 5세손이다. 하루는 “나는 설파 화상이 우리나라 화엄의 종주라고 들었으나 아직 나아가 참례하지 못했다. 이는 내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셨다. 마침내 폐백을 가지고 가서 영원정사에서 배알하였다. 설파 화상이 갑자기 손을 잡고 기뻐하시면서 “나 역시 스님과 함께하기를 오래전부터 바랐네. 어찌 그리 늦었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잡화경』[1]잡화경雜華經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을 강의하자 여덟 달 만에 끝을 보았고 이어서 『선문염송』으로 마음의 찌꺼기를 녹여내었다. 얼마 뒤에 선제가 되길 원하자 화상이 “좋다.”라고 하고 또 “스님은 진중하여 오늘날에는 동량이고 후세에는 모범이 될 것이니 우리의 도가 얼마나 다행입니까?”라고 하였다. 돌아가 비슬산ㆍ팔공산ㆍ학산ㆍ용산ㆍ불령산 등 여러 산에서 교화를 행하셨으니 번거로워 다 기록할 수 없다. 스님은 부여받은 성품이 넉넉하고 거동은 항상 느긋하셨으며 조금도 걱정하는 용모가 없으셨다. 그분을 뵙는 이는 마음으로 기뻐하여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상의 독실함에 이르러서는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비록 옛 어진 스님들에 비교한다면 그럴만한 이가 누구겠는가? 밤에는 참선하여 침소에 드는 것은 오직 두 시간뿐이었다. 낮에는 강하였는데 그 사람의 높낮이를 따라 자상하게 일러주어 쉽게 이해하여 통달하지 못하는 폐단이 없게 하였다. 심지어 세속의 유학자들이 복희씨의 『주역』을 들고 배우러 오는 이가 많았는데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으셨다. 이 누가 이렇게 하게 한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도가 점점 미약해져 세상에서 불교를 배우는 이가 거의 없는데도 여러 지방에서 경전의 뜻을 연마하고자 하는 이들이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함께 모인 자들이 항상 백 명이 넘어서 영산의 옛 자취와 비슷하였다. 애석하구나! 때를 만나지 못함이여. 만약 전성기에 태어나셨다면 교화한 대중이 어찌 오늘날의 숫자에 그치겠는가? 경술년에 조정에서 새로 용주사를 짓고 불상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임금님이 “당세의 이름난 승려를 뽑아서 그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다. 이때 스님이 그 증명 법사가 되어 불복장 원문을 지었다. 주상께서 그 글을 가져다 보시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어찌 승려이면서 글에 능숙한 이가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은지恩旨를 내리셨다. 이것은 송운[2]송운松雲 :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다.과 벽암 이후에 없었던 일이니, 귀중함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그 뒤에 임금님이 얼굴을 대하는 꿈을 자주 꾸었으니 자세한 것은 시집에 보인다 어찌 성은에 깊이 감동하여 어느 때이고 감히 잊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성상 병진년 5월 15일에 돌아가셨으니 세수는 51세이고 법랍은 34세였다. 아! 이러한 덕이 있으면서도 이처럼 장수하시지 못하셨구나. 어찌 하늘이 우리 도를 떨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랴? 길을 가는 사람들은 서로 “인악 스님이 돌아가셨으니 산중의 일은 끝났다.”라고 한다. 심한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그 대략이다. 만약 돌아가실 때의 신령스러운 상서와 기이한 자취라면 다 적을 수 없다. 제자 성안이 삼가 짓는다.
관련주석
  • 주석 1 잡화경雜華經 :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 주석 2 송운松雲 :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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