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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쾌선 선사의 행장-상봉문보

기성 쾌선(箕城快善, 1693~1764) 스님은 당호가 기성당, 법명이 쾌선, 속성(俗姓)은 류씨(柳氏)이며,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시흥(時興)이다. 13세에 팔공산 송림사(松林寺)로 들어가 14세 때 민식(敏湜) 스님에게 머리를 깎았으며, 25세 때에 낙빈당(洛濱堂) 홍제(弘濟)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다. 1740년에 뜻이 같은 30여 명과 함께 기기암(奇奇庵)을 결사하였고, 1743년에 동화사 부도암의 위쪽에 초막을 짓고 선정에 힘썼다. 1764년에 대중들에게 『열반경』을 강론하고 다음날 태연히 입적하였다. 이때가 세수 72세, 승랍 59세였다. 동화사의 상봉 대사 부도 아래에 탑을 세웠다. 저술로 「청택법보은문(請澤法報恩文)」, 〈염불환향곡(念佛還鄕曲)〉 등이 남아 있다. 글씨를 잘 써서 주변 사찰들이 스님의 글씨를 편액으로 걸어둘 정도였다고 하며, 동화사와 은해사에 많은 편액을 남겼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기성 스님이 18세기 팔공산 지역의 정토 신앙과 염불 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 동화사와 송림사에 〈기성대사비〉가 남아 있으며,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스님의 진영이 남아 있다. 또한 스님의 행장(行狀)은 『상봉문보(霜峰文譜)』(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에 실려 있다. 『상봉문보』는 1922년 해응 김석주(海應 金錫柱) 스님이 상봉 정원(霜峰淨源, 1627~1709)의 법맥을 정리하고, 상봉 이하 각 인물들의 비명(碑銘)과 행장을 간략히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낙빈 홍제(洛濱弘濟), 기성 쾌선 스님 등에 대한 행장이 기록되어 있어 그 가치가 크다.
원문
箕城快善禪師 行狀 法名快善箕城堂號俗姓柳氏同知中樞府事公時興子也母昌原黃氏李朝肅宗癸酉歲生於漆谷府內也頂濶準直面黧目瑩十三歲入八公山松林寺十四零髮于敏湜和尙受具於西歸大師受業于道德山太照禪師落賓堂弘濟大師二十五學高律嚴落濱師遂授印賛傳衣昇堂又工於筆法遒健流動諸寺標揭多師心畵徒衆日進提耳警誨趮戱革心一日告衆曰萬緣歸寂卽是上乘豈終區區說偈爲爾曹皆去吾不復講癸亥搆草幕于桐華寺浮屠庵上谷默會禪定至夜半曲肱假寐而已人稱毓八公山精庚申同志三十人成精籃於銀海寺上谷與之結社卽今奇奇庵也癸未問牧庵長老之病於禪本寺出捏槃經講說自若昱日不疾而化世壽七十二僧臘五十九徒衆位遺命火葬于東峯下頂骨超出於數百武外層岩上白玉光明山野燦然遂塔于桐華寺之霜峯大師浮屠下所著還鄕曲報恩文二篇在架其大略則具載於李彌所撰碑文若其捨敎念西之緣定亂修禪之蹟母來致齊之聖行化度衆之方至今流傳於衆口煩不能記
번역문
기성쾌선 선사 행장 법명은 쾌선(快善)이고 호는 기성당(箕城堂)이며, 속성은 류씨이다.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시흥 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창원 황씨이다. 숙종 계유년(1693)에 칠곡부에서 태어났다. 정수리가 넓고 코가 곧았으며 얼굴은 검었고 눈은 빛났다. 13세에 팔공산 송림사로 들어갔다. 14세에 민식(敏湜) 화상에게 머리를 깎았으며 서귀대사(西歸大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고 도덕산(道德山)의 태조선사(太照禪師)와 낙빈당(落賓堂) 홍제대사(弘濟大師)에게 수업받았다. 25세 때 고율엄(高律嚴) 낙빈대사(落濱大師)에게서 드디어 인가를 받아 법복을 이어받고 승당하였다. 또 붓글씨를 잘 썼는데, 그 필법은 웅건하고 물 흐르는 듯하여 여러 절에서 스님의 글씨를 표식으로 많이 내걸었다. 일반 대중들이 매일 같이 찾아왔는데, 귀로 직접 말하는 듯하였고, 방만함을 조심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경계해 주었다. 하루는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갖가지 인연(因緣)은 공적(空寂)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상승(上乘)의 근기(根機)에 해당되는 것이니 어찌 끝끝내 구차하게 설법하겠는가? 그대 무리를 위해 설하는 것은 모두 희론(戱論)이니 나는 다시는 강론하지 않겠노라.”라고 하였다. 계해년(1743) 초막을 동화사 부도암 윗 계곡에 설치하고 묵묵히 선정에 들기를 밤 늦도록 하였고, 팔꿈치를 베고 잠깐 누울 뿐이었다. 사람들이 칭하기를 팔공산의 정기를 기른다고 하였다. 경신년(1740)에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이 모여 은해사의 윗 계곡에 가람을 지으려고 하니, 그들과 함께 결사를 하였다. 곧 지금의 기기암(寄寄庵)이다. 계미년(1763)에 목암 장로가 선본사에서 병이 들자 병문안을 갔다. 열반경을 태연하게 강론하고, 다음날 특별한 병 없이 입적하였다. 세수 72세, 승랍 59였다. 승도 대중들은 유명에 따라 동쪽 봉우리 아래에서 화장을 거행하니 정수리 뼈가 수백 개였는데, 마치 암석 위에 층층이 쌓은 백옥(白玉)과 같아서 산과 들판이 환하게 빛났다. 드디어 동화사의 상봉(霜峰) 대사의 부도 아래에 탑을 세웠다. 저술로는 〈환향곡〉, 「보은문」 두 편이 남아 있다. 그 대략이 이미(李彌)가 찬술한 비문에 갖추어 실려 있다. ‘사교념서지연(捨敎念西之緣)’, ‘정란수선지적(定亂修禪之蹟)’, ‘모래지재지성(母來致齊之聖)’, ‘행화도중지방(行化度衆之方)’ 등과 같은 것들은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입으로 흘러 전해지는 것들이니, 번거로이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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