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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창건주 혜철국사

1943년에 은해사에 건립된 〈팔공산 은해사 사적비(八公山銀海寺事蹟碑)〉에는 은해사의 시작을 신라의 혜철 국사(惠哲國師) 스님이 809년에 창건한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혜철 국사, 즉 적인 선사(寂忍禪師, 785~861) 스님은 신라 말에 활동한 선사(禪師)이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동리산문(銅裏山門)의 개조(開祖)이다. 스님의 제자는 도선 국사(道詵國師, 827~898), 광자 대사(廣慈大師, 864~?)를 포함하여 수백 명이 넘었으며, 제자들은 스님의 선풍을 계승하여 동리산문을 형성하는 등 신라 말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스님의 행적은 872년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건립된 〈적인선사비(寂忍禪師碑)〉의 내용을 통해 확인된다. 적인 선사 스님의 휘는 혜철(慧徹)이며,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주 사람이다. 스님의 조부는 경주에서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인 삭주(朔州) 선곡현(善谷縣)으로 낙향하였다. 스님 역시 785년에 태어난 이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스님은 15세가 되자 영주 부석사(浮石寺)로 출가하여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이후 22세가 되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선종의 가르침을 받고자 814년 8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스님은 중국 공공산(龔公山)에서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던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 스님께 법을 전해 받았다. 서당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서 대장경을 탐구한 뒤, 839년 봄 2월 신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스님은 무주 쌍봉사(雙峯寺)에서 머무르다가 곧 곡성 대안사(大安寺, 지금의 태안사)에 거처하였다. 이때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고 한다. 또한 문성왕(文聖王)은 자주 서신을 내려 스님을 위문하였고, 대안사 사방 바깥에 살생을 금지하는 당(幢)을 세울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스님이 816년 2월 6일 향년 77세, 법랍 57년으로 입적하자 대안사에는 스님의 부도가 건립되었다. 이후 868년 경문왕(景文王)은 스님의 비를 건립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울러 적인(寂忍)이라는 시호와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는 탑호를 추증하였다. 스님의 비는 872년 대안사에 건립되었으며, 최하(崔賀)가 글을 짓고 극일(克一)이 글씨를 썼다. 신라 당시 세워진 〈적인선사비〉는 사라졌고, 비문의 내용만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태안사지(泰安寺誌)』 등에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태안사 경내에 있는 비는 1928년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적인 선사 스님은 주로 태안사와의 인연이 돋보이지만, 은해사와의 인연 역시 살펴진다. 〈은해사 사적비〉(1943)에 따르면, 신라 헌덕왕(憲德王) 809년에 적인 선사 스님이 절을 창건하고 해안사(海眼寺)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해안사는 1545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546년 천교(天敎) 스님이 내탕금을 지원받아 절을 옮기고 이름을 은해사라 고쳤다고 전한다. 즉 해안사는 은해사의 전신이 되는 것으로 적인 선사 스님은 은해사의 창건주라 할 수 있다. 스님이 중국에서 서당 지장 스님의 법을 전수받은 점이나 귀국 후 동리산문을 개창한 점 등을 통해 보았을 때, 스님이 창건한 은해사는 선찰(禪刹)로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은해사가 창건된 809년은 혜철국사 스님이 본격적으로 선종을 접하기 이전 곧 『화엄경』 공부에 매진한 시기였으므로 은해사는 화엄과 관련된 사찰로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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