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1911)에는 1816년 은해사에 건립된 영파 성규(影坡聖奎, 1728~1812) 스님의 비에 관한 자료인 ‘유명조선국선교양종정사화엄대강주영파대사비명병서(有明朝鮮國禪教兩宗正事華嚴大講主影波大師碑銘并序)’가 있다.
영파 스님의 비문은 대사의 문도 몽필(夢弼)과 석민(碩旻) 스님이 규장각제학 남공철(南公轍, 1760~1840)에게 비문을 청하였고, 심의경(沈宜慶)이 글씨를 썼다. 비신의 앞면에는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의 의발(衣鉢)을 계승한 영파 대사의 행장이 자세히 적혔고, 뒷면에는 대사의 문도(門徒)와 은해사 종사(宗師)의 법명이 나열되어 있다.
영남지역의 대표적 학승인 영파 대사는 은해사에 주석하는 동안 〈갑자갑수공명비(甲子甲樹功銘碑)〉(1793)를 비롯하여 『영천군 은해사 사적』(1798), 『오백성중청문(五百聖衆請文)』(1805) 등을 편찬하였다. 은해사를 비롯해 김룡사, 용문사, 통도사 등에 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사찰사료』에서 은해사 관련 자료는 9건, 기기암·묘봉암·운부암·백흥암 등 소속 암자에 관한 자료는 8건, 모두 17건이 확인되며, 그 원문과 번역문은 동국대학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
원문
有明朝鮮國禪教兩宗正事華嚴大講主影波大師碑銘并序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佐賓客五衛都總府都總官奎章閣提學 南公轍撰。
奉列大夫行典牲署副奉事 沈宜慶書。
將仕郎繕工監假監役 俞漢芝篆。
我東方佛法之盛。昉自羅麗。名藍巨剎。相望諸道。逮至本朝。儒賢輩黜[1]黜은 出의 오자.。斥佛之論始盛。而間有樹立傑然者。則士大夫公言顯誦而進之。若西山大師休靜是已。粵在宣廟壬辰。倭寇充斥 車駕播越。當是時。西山慨然倡義旅。談笑揮之。又進其弟子惟政。奉使日本。和議遂成。社稷賴以復安。其忠君衛國之誠。固已令冠儒服儒者吐舌矣。厥後衣鉢相傳六世。而有影波大師焉。潛受戒珠。密傳心印。其誦經[2]經 뒤에 之 결락.勤。持律持[3]持은 之의 오자.嚴。非徒軌範禪門。矜式僧徒。況聞其[4]其 뒤에 恭具 결락.香燭。每夜頂禮仰祝聖主之壽。至老不廢。如非君臣之大義根於秉彝者。烏能與於此乎。
大師法名聖奎。字晦隱。俗姓全氏。高麗玉山君永齡之十六世孫也。父曰萬紀。母凝川朴氏。夢大星入懷而有娠。以英廟戊申十一月十一日生。兒時命名泰夢。以表其異。大師生標奇骨。卓越凡流。年十五。讀書於清涼庵。見供佛時。諸[5]諸 뒤에 僧 결락.回旋膜拜。若有妙悟宿因。忽發捨身之願。
越四年。辭家至湧泉寺。自投五軆。處[6]處는 虔의 오자.請出家。喚應長老愛而許之。遂令削染。遽受戒律。是夜夢見披緇老釋立于階前。鳴磬作禮者三。自是四遠叅尋。雲遊訪道。歷叅海峯燕巖龍坡影虗諸名師。服膺其教。勤苦得力。一日忽思曰。釋門闡教者。以頓悟為先。乃於金剛臺設伊蒲盛供滌潔道場。仰祈觀音法力。既罷齋。夢入一室。見佛書滿架。裝潢鮮淨。盡是華嚴經。傍有老僧指曰。道在是矣。
越九年。黃山退隱長老。一見而心契。以華嚴全部授之。[7]摩 결락.挲粧卷。果符前夢。讀之既熟。乃[8]乃는 仍의 오자.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探重玄之理。究重妙之旨者。三十年如一日。譬之儒家。其所謂真寶[9]寶는 實의 오자.心地刻苦工夫者歟。常[10]常은 嘗의 오자.謂禪工持誦為最。以普賢觀音兩菩薩為願佛。致齋尤勤。又自戊申至辛丑。誦大悲咒[11]咒는 呪.十萬。遍日以為課。自甲戌以來。叅雪坡涵月二和尚。盡得華嚴宗旨及禪教要領。仍受信衣豋壇。盖空門之淵源。有自來矣。
壬申[12]申은 辰의 오자.七月二十七日。以微疾示寂。報齡八十五。僧臘六十有六。先是夢見天狗星。問已[13]已는 己의 오자.窮達壽夭。則答曰。名滿東國。達而不窮。壽至八十加五。至是果驗。火浴之夕。靈雨霏微。祥雲翳空。于時慕義者寄聲相吊。受業者銜悲以泣。是豈無所以而然哉。
噫。師之品性溫柔。志氣清明。喜怒不形於色。貨利不縈於懷。由是早捿淨土。久離客塵。慈航寶筏。普濟[14]濟 뒤에 衆 결락.生。貧疾[15]疾은 病으로 되어 있다.到門。若恫在己。或有來丐[16]丐 뒤에 者 결락.。則隨力賙給。小無難色。故食客之屢[17]屢는 屣의 오자.則一芥不以取諸人。尤豈不難哉。至若西經千甬[18]甬은 凿의 오자. 凿은 착鑿의 이형자이다.。復[19]復은 腹의 오자.貯其笥。東南名剎。足跡殆遍。所化徒眾。不翅千百。師之風聲。無往不布。若此者。雖古之名釋。無以加此矣。前後夢徵頗異。且念大師不必虛張而欺世。此亦略書焉。
弟子知添。即其高足也。自垂髻時。常遊其門。有所觀感者深。今焉永切追摩[20]摩는 攀의 오자.。謀樹豐牌。撮其耳日[21]日은 目의 오자.之所睹記。走其徒夢弼碩旻等。裹足千里。請文於淵[22]淵은 余의 오자.。[23]閱 결락.累年[24]而 결락.益勤。余於禪家文字。未嘗數[25]數 결락.為之。而至如西山泗溟。竊有曠感者存。曾撰紀績之牌[26] 牌는 碑의 오자.矣。大師之於西山泗溟。是[27]是는 寔의 오자.為嫡傳。而具[28]具는 且의 오자.其中有貞。不絕俗者存焉。烏可無述乎。遂[29]不 결락.辭而為之文。係之銘曰。
維此禪伯。沙門之傑。慈[30]慈는 葱의 오자.嶺宿根。華嚴妙訣。水月澄依[31]依는 懷의 오자.。煙霞怡神。莊蝶挧々。非幻即真。密受秘印。旋登法壇。淨室止水。作如是觀。上溯淵[32]源 결락.。旁逋[33]逋는 通의 오자. 津筏。一念慈悲。不自為伐。律身之嚴。無愧吾儒。仁者必壽。理不可誣。因西[34]西는 果의 오자.方圓。法棟俄摧。人亡道存。緇素興哀。睠彼山門。龜頭十尋。我作銘辭。永垂祗林。
崇禎紀元後三丙子六月 日立。
번역문
유명 조선국 선교양종정사 화엄대강주 영파대사 비명과 서문[35]원문 교감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 정보시스템’에 수록된 자료를 참고하였다.보국숭록대부 행판중추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규장각제학 남공철이 글을 짓고,
봉열대부 행 전성서 부봉사 심의경이 글씨를 쓰고,
장사랑 선공감 가감역 유한지가 전액을 쓰다.
우리 동방에 불법이 번성하게 된 것은 신라 고려 때부터이니, 이름난 가람과 큰 사찰들이 여러 도에 즐비하였다. 그런데 본조(조선)에 와서는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가 처음으로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혹 매우 뛰어난 공을 세운 이가 있으면 사대부들도 공개적으로 말하고 드러내 칭송하였다. 서산대사 휴정 같은 분이 그렇다. 선조 임진년에 왜적이 떼지어 오니 임금의 수레가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서산대사가 탄식하며 의병을 일으키고 담소하며 지휘하였다. 또 그 제자 유정을 나아가게 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화의가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사직이 그 덕분에 안정을 회복하였다. 그 충군위국의 정성은 진실로 이미 유학자의 관을 쓰고 유학자의 옷을 입은 이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하였다.
그 뒤 의발이 6세를 전하여 영파 대사가 있었으니 은밀히 계주를 받고 비밀리에 심인을 전해 받았다. 경전을 독송하는 근실함과 계율을 지키는 엄격함은 선문의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승도들의 표본이 되었다. 하물며 공경을 다해 향을 피우고 매일 밤 절하며 임금의 장수를 축원하기를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하니, 군신의 대의가 떳떳한 본성에 뿌리를 내린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대사의 법명은 성규, 자는 회은, 속성은 전씨로 고려 옥산군 영령의 16세손이다. 아버지는 만기이며 어머니는 응천 박씨로, 큰 별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영조 무신년(1728) 11월 11일에 낳았다. 어릴 때는 이름을 태몽이라고 하여 그 기이함을 나타내었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뛰어난 골격이 보통 사람들보다 탁월하였다. 15세에 청량암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예불을 드릴 때 여러 승려들이 빙 돌다가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고, 마치 오랜 인연을 묘하게 깨달은 듯이 홀연히 몸을 바치려는 서원을 세웠다.
4년 후에 집을 하직하고 용천사에 이르러 스스로 오체투지하여 출가하기를 경건히 청하였다. 환응 장로가 어여삐 여겨 허락하여 마침내 삭발하고 급히 계율을 받게 하였다. 이날 밤 꿈에 치의(승복)를 걸친 노승이 섬돌 앞에 서서 경쇠를 울리며 세 번 예를 올리는 것을 보았다. 이후 사방으로 멀리까지 고승을 찾아뵙고 구름처럼 떠돌며 도를 물었다. 해봉, 연암, 용파, 영허 등 여러 이름난 대사들을 두루 찾아가서 그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겼으니 부지런히 애써서 힘을 얻었다.
하루는 문득 생각나서 말하기를, “불문에서 가르침을 드러내 밝히는 것은 돈오를 우선으로 삼는다.”라고 하고, 금강대에 이포성공척결도량[36]이포성공척결도량伊蒲盛供滌潔道場 : 간소하게 삿자리만 깔고 하루에 4번 정근하는 기도 도량을 말한다. 새벽, 10시, 2시, 저녁에 정근한다. 을 설하여 관음보살의 법력을 우러러 기도하였다. 재를 마친 후, 꿈에 어느 방으로 들어가 보니 불서가 책꽂이에 가득하였는데 책을 장정해 꾸민 것이 곱고 깨끗하였으니 모두 화엄경이었다. 옆에 있던 노승이 가리키며 말하기를, “도는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9년 뒤에 황산 퇴은 장로가 한번 보고 마음에 계합하여 화엄경 전부를 그에게 주었는데, 다듬어 장식한 책이 과연 앞서 꾼 꿈과 들어맞았다. (화엄경을) 읽어보니 이미 익숙하였고 거듭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고 오묘한 뜻을 규명하기를 30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유가에 비유하면 이른바 ‘진실된 마음 바탕 위에서 각고의 공부를 한다.’[37]진실된~한다 : 주희의 문인인 황간黃榦이 임천현臨川縣에서 현승縣丞의 아들인 하기何基를 제자로 받아들일 때 이르기를, “학문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 바탕 위에서 각고의 공부를 해야만 가능하다.(必有眞實心地 刻苦工夫 然後可)”고 하였다. 는 것이리라. 일찍이 선 공부에는 지송(수지독송)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여 보현, 관음 두 보살을 원불로 삼아 제계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또 무신년부터 신축년까지 대비주를 10만 번 외는 것을 매일의 과제로 삼았다. 갑술년 이래로 설파[38]설파雪坡 : 설파상언雪坡尙彦(1707~1791)으로 화엄학의 대가였다. 연봉蓮峰과 체정體淨의 법맥을 이었다. 저서로 『청량초적결은과淸凉鈔摘抉隱科』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여부를 알 수 없다. , 함월[39]함월涵月 : 함월해원涵月海源(1691~1770)으로 삼장(三藏)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화엄경』·『선문염송집』에 밝았다. 환성지안喚惺志安의 법맥을 이었다. 저서로 『천경집天鏡集』이 있다. 두 화상을 찾아뵙고 화엄의 종지와 선교의 요령을 모두 터득하였으므로, 신의信衣[40]신의信衣 :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고 전법傳法의 증표로 주는 법의法衣를 말한다. 를 받고 단에 올랐으니 공문의 연원에 유래가 있는 것이다.
임진년 7월 27일에 가벼운 병으로 입적하였으니 나이 85세였고 승랍 66년이었다. 이보다 앞서 꿈에 천구성[41]천구성天狗星 : 유성流星, 또는 혜성彗星을 가리킨다. 을 보고, 자신의 곤궁함과 영달함, 수명을 물어보니 답하기를, “명성이 동국에 가득할 것이요, 영달하여 곤궁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은 85세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에 이르러 과연 들어맞았다. 화장을 하는 날 저녁에는 영험한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상서로운 구름이 허공을 가렸다. 이때 의리를 우러러 받드는 이가 인편에 전해 조문하였고 수업을 받은 자는 슬픔을 머금고 눈물 흘렸으니, 이 어찌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아! 스님의 성품은 온유하고 의지와 기백은 맑고 밝았으며 희로애락이 얼굴빛에 드러나지 않았고 재물 욕심이 마음을 얽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일찍부터 정토에 머물며 오래도록 번뇌를 여의어 자비의 배, 보배 뗏목이 되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자가 문에 이르면 자기 일처럼 아파하였고, 혹 구걸하러 오면 힘닿는 대로 보태주고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므로 식객들의 신발이 늘 문밖에 즐비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다스리기를 매우 엄격히 하여서 매일 반드시 옷을 단정히 입고 가부좌를 하여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평생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았고 공손하게 삼가며 겸양하였다. 의롭지 않으면 겨자 하나라도 남에게서 얻지 않았으니, 더욱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경전으로 말하면 수없이 연구하여 마음속에 그 상자를 쌓아두었다.
동쪽과 남쪽의 이름난 사찰에는 발자취가 거의 다 미쳤으니 교화된 무리가 수천 수백뿐이 아니었다. 스님의 풍모와 명성은 가는 곳마다 널리 퍼졌으니 이와 같은 것은 비록 옛날의 이름난 승려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니, 전후의 꿈의 징험이 매우 기이하도다. 또 생각건대 대사는 필시 허세를 부려 세상을 속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여기에 또한 대략 적었다.
제자 지첨은 그의 뛰어난 제자이다. 동자 때부터 항상 문하에서 노닐며 보고 느낀 바가 깊으므로 지금 길이 절실하게 추모하여 공적비[42]공적비 : 원문의 豊牌는 공적을 기록한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를 세우고자 하여 그 눈과 귀로 보고 들은 바를 뽑아 기록하였고, 그 문도 몽필과 석민 등을 천 리 길을 보내 나에게 기문을 청하기를 여러 해 동안 더욱 열심히 하였다. 나는 선가의 문자를 자주 쓴 적은 없지만, 서산과 사명에 이르러서는 마음속에 오랜 감회가 있으니, 일찍이 기적비의 비문을 지었다.[43]기적비紀績碑의 비문을 지었다 :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강원도 관찰사를 할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기적비 비문을 썼다. 사명대사비는 건봉사乾鳳寺에 세워졌다. 금릉집 권16 「건봉선원 사명대사 기적비명乾鳳禪院泗溟大師紀績碑銘」대사는 서산과 사명에게는 바로 적전이 되며, 또 그 마음속에 지조가 있으면서도 세속을 단절하지 않았으니 어찌 서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사양하지 못하고 글을 쓰고 이어서 명을 붙인다.
이 선백[44]선백禪伯 : 선사禪師의 존칭이다.은
사문의 걸출한 분이시니
총령[45] 총령葱嶺 : 파미르 고원으로 중국과 인도를 오가는 길목이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유입될 때 이 길을 통하였으므로 불교를 가리킨다. 의 묵은 뿌리요
화엄의 묘한 비법이로다
물에 비친 달처럼 맑은 마음과
안개 노을같이 온화한 마음으로
장자의 나비처럼 훨훨 날았으니
환영이 아니라 바로 사실이었도다
비밀스러운 심인을 은밀히 받고
곧장 법단에 올랐으니
깨끗한 방과 고요한 물 같은 마음으로
그와 같이 보았도다[46] 그와 같이 보았도다 : 원문의 ‘作如是觀’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應作如是觀’을 인용한 것이다. 금강경「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또한 아침 이슬이나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라는 말이 나온다.
연원을 거슬러 올라
나루와 뗏목[47] 나루와 뗏목 : 원문 ‘津筏’은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킨다.을 분명히 알았지만
한 생각 자비심을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도다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림은
우리 유가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어진 자는 반드시 오래 사는 법이라
이치는 속일 수 없도다
원인과 결과가 원만하여
법의 동량이 갑자기 꺾이었으니
사람은 죽고 도만 남아
승속이 슬퍼하도다
저 산문을 바라보니
비석[48]거북머리 : 비석의 귀두龜頭로, 비석을 가리킨다.이 열 길이라
내가 명을 지어
길이 사찰에 전하노라
숭정 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1816) 6월 일에 세우다.
관련주석
- 주석 1 黜은 出의 오자.
- 주석 2 經 뒤에 之 결락.
- 주석 3 持은 之의 오자.
- 주석 4 其 뒤에 恭具 결락.
- 주석 5 諸 뒤에 僧 결락.
- 주석 6 處는 虔의 오자.
- 주석 7 摩 결락.
- 주석 8 乃는 仍의 오자.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 주석 9 寶는 實의 오자.
- 주석 10 常은 嘗의 오자.
- 주석 11 咒는 呪.
- 주석 12 申은 辰의 오자.
- 주석 13 已는 己의 오자.
- 주석 14 濟 뒤에 衆 결락.
- 주석 15 疾은 病으로 되어 있다.
- 주석 16 丐 뒤에 者 결락.
- 주석 17 屢는 屣의 오자.
- 주석 18 甬은 凿의 오자. 凿은 착鑿의 이형자이다.
- 주석 19 復은 腹의 오자.
- 주석 20 摩는 攀의 오자.
- 주석 21 日은 目의 오자.
- 주석 22 淵은 余의 오자.
- 주석 23 閱 결락.
- 주석 24 而 결락.
- 주석 25 數 결락.
- 주석 26 牌는 碑의 오자.
- 주석 27 是는 寔의 오자.
- 주석 28 具는 且의 오자.
- 주석 29 不 결락.
- 주석 30 慈는 葱의 오자.
- 주석 31 依는 懷의 오자.
- 주석 32 源 결락.
- 주석 33 逋는 通의 오자.
- 주석 34 西는 果의 오자.
- 주석 35 원문 교감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 정보시스템’에 수록된 자료를 참고하였다.
- 주석 36 이포성공척결도량伊蒲盛供滌潔道場 : 간소하게 삿자리만 깔고 하루에 4번 정근하는 기도 도량을 말한다. 새벽, 10시, 2시, 저녁에 정근한다.
- 주석 37 진실된~한다 : 주희의 문인인 황간黃榦이 임천현臨川縣에서 현승縣丞의 아들인 하기何基를 제자로 받아들일 때 이르기를, “학문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 바탕 위에서 각고의 공부를 해야만 가능하다.(必有眞實心地 刻苦工夫 然後可)”고 하였다.
- 주석 38 설파雪坡 : 설파상언雪坡尙彦(1707~1791)으로 화엄학의 대가였다. 연봉蓮峰과 체정體淨의 법맥을 이었다. 저서로 『청량초적결은과淸凉鈔摘抉隱科』 1권과 『구현기鉤玄記』 1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여부를 알 수 없다.
- 주석 39 함월涵月 : 함월해원涵月海源(1691~1770)으로 삼장(三藏)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화엄경』·『선문염송집』에 밝았다. 환성지안喚惺志安의 법맥을 이었다. 저서로 『천경집天鏡集』이 있다.
- 주석 40 신의信衣 :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고 전법傳法의 증표로 주는 법의法衣를 말한다.
- 주석 41 천구성天狗星 : 유성流星, 또는 혜성彗星을 가리킨다.
- 주석 42 공적비 : 원문의 豊牌는 공적을 기록한 거대한 석비石碑를 말한다.
- 주석 43 기적비紀績碑의 비문을 지었다 :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강원도 관찰사를 할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기적비 비문을 썼다. 사명대사비는 건봉사乾鳳寺에 세워졌다. 금릉집 권16 「건봉선원 사명대사 기적비명乾鳳禪院泗溟大師紀績碑銘」
- 주석 44 선백禪伯 : 선사禪師의 존칭이다.
- 주석 45 총령葱嶺 : 파미르 고원으로 중국과 인도를 오가는 길목이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유입될 때 이 길을 통하였으므로 불교를 가리킨다.
- 주석 46 그와 같이 보았도다 : 원문의 ‘作如是觀’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應作如是觀’을 인용한 것이다. 금강경「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또한 아침 이슬이나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應作如是觀。)”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47 나루와 뗏목 : 원문 ‘津筏’은 고해를 건너 피안으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리킨다.
- 주석 48 거북머리 : 비석의 귀두龜頭로, 비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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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파 성규와 은해사영파 성규(影坡聖奎, 1728~1812) 스님은 청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의 6세손으로 편양 언기, 환성 지안, 함월 해원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스님은 은해사의 많은 불사를 이루어내었을 뿐 아니라 염불 신앙과 참선 그리고 화엄의 종지를 크게 드날린 스님이다. 스님의 행적은 〈은해사 영파대사비(銀海寺影坡大師碑)〉(1816)와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수록된 「영파강사전(影坡講師傳)」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파 성규 스님은 1728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회은(晦隱)이고 속성은 전씨(全氏)이다. 스님은 ... -
동사열전-영파강사전『동사열전(東師列傳)』은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 스님이 우리나라 역대 고승들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집한 고승전이다. 범해 각안 스님은 1833년 두륜산 대흥사(大興寺)에서 출가하였으며, 대흥사의 대강사(大講師) 13명 중 한 명이다. 스님은 일생에 걸쳐 여러 저술을 남겼다. 임진왜란 등 수차례의 전란으로 우리나라 불교 관련 기록들이 다수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승려들의 사적과 계보는 신뢰할 만한 저술이 없었으므로 스님이 직접 『동사열전』을 편집하였다고 한다. 이 책은 6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국시... -
영파당대선사 진영은해사의 고승인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의 진영이다. 영파 성규 스님의 일생에 관해서는 〈은해사 영파대사비(銀海寺 影波大師碑)〉(1816)와 『동사열전(東師列傳)』 「영파강사전(影波講師傳)」(1894)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스님은 서산 스님의 6세손으로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 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 스님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또한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에게 수학하며 글씨에서도 기량으로써 찬탄과 존경을... -
영파대사비〈영파대사비〉는 은해사 승탑원 내 좌측에 위치하며, 〈일암당 대선사 경의탑(一庵堂大禪師警誼塔)〉, 이름 없는 〈승탑〉(逸名僧塔) 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있다. 이 작품은 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스님의 비석으로 1816년에 건립되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비문을 짓고, 전생서(典牲署) 부봉사(副奉事)인 심의경(沈宜慶, 1783~?)이 비문을 썼으며,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전서(篆書)를 썼다. 영파 성규 스님은 서산 대사(西山... -
갑자갑수공명비〈갑자갑 수공명비〉는 갑자갑계(甲子甲契)에서 은해사에 바친 땅과 시주에 대한 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793년에 건립한 비석이다. ‘갑자갑계’란 갑자년(甲子年)에 태어난 동갑들이 맺은 계이다. 이 비석은 은해사 승탑원의 2열 비석군(碑石群) 중 오른쪽에서 아홉 번째에 건립되어 있다. 원수방부(圓首方趺) 형태로 비석의 앞면과 뒷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왼쪽 측면에 ‘은해사’라고 큰 글씨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비신 앞면의 상단에 ‘갑자갑수공명비(甲子甲樹功銘碑)’라고 전서(篆書)로 새겨져 있으며, 비문은 영파 성규(影波聖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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銀海寺 寺誌 : 本社.山內庵子 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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