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악 의첨(仁嶽義沾, 1746~1796) 스님의 문집 『인악집(仁嶽集)』 권2에 「백흥암 영산전의 부처님과 보살과 나한 여러 성인의 상을 조성한 기문[百興菴靈山殿塑成佛菩薩及羅漢諸聖像記]」이 실려 있다.
백흥암은 은해사에 속한 암자로 팔공산 태실봉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영산전의 ‘영산’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께서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강설하셨던 곳이니, 이러한 상황을 형상화한 것이 영산전이다. 위 기문은 이 전각에 불보살과 나한상들을 조성하여 봉안한 일을 기록한 글이다. 기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백흥암은 원래 873년(신라 경문왕 13)에 창건하여 ‘백지사(柏旨寺)’라 하였는데, 1546년에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산전은 16나한을 받드는 곳으로 석가모니와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중심인데 그 세 구가 빠져 있었다. 십육 나한 중에서 또 반탁가(半託迦)와 벌라바사(伐羅婆沙)가 빠져 있어, 아는 이들은 대부분 이를 흠으로 여겼다. 문중의 도봉(道峯) 노스님이 병오년(1786) 7월 19일에 재계하고 일을 시작하여 부처님과 보살상을 받들어 조성하여 중심 자리에 놓고, 나머지도 각기 소목(昭穆)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앉혔다. 일을 마치고 암자의 승려 탄경(坦敬)이 부탁하여 기문을 지었다.
원문
百興菴靈山殿塑成佛菩薩及羅漢諸聖像記
百興故寺。革爲菴。冥府靈山等殿。因舊俗。皆隷本庵。蓋靈山殿。所以奉十六羅漢者。釋迦彌竭羅。即十六羅漢之主。而舊闕其三軀。於十六羅漢之中又闕半託迦伐羅婆沙。有識者多病之。吾門老道峯和上。眂菴八年。法化流行檀越附從。於菴中事。細大無不蒐輯以至器用什物。悉措置而潤色之。眞百廢俱興。而獨未及靈山殿事。道場之少顏色。以此。乃於丙午七月十九日庚申。齋戒告于神。命工擧事。浹二旬乃成新造凡五佛一菩薩及羅漢各二。其餘羅漢。亦皆重修之。遂奉佛菩薩爲主位。餘各依昭穆列坐。明明穆穆。如有相得之樂焉。事旣竣。菴人坦敬。來請余記。余與之坐而告曰。敬。凡佛事造成與尊奉。皆有福利。造成之勞。已自和上。尊奉之責在公等。公等其勉哉。使和上聞者。必不易吾言矣。敬跽曰。荷長老慇懃。謹當佩服罔墜。遂書其事以歸之。眂事人曰。國英圓慧。
번역문
백흥암 영산전의 부처님과 보살과 나한 여러 성인의 상을 조성한 기문
백흥사 옛 절은 바뀌어서 암자가 되었다. 명부전과 영산전 등은 옛 관습을 따라 모두 본사의 암자에 예속되었다. 영산전은 십육 나한을 받드는 곳으로 석가와 미륵과 갈라가 바로 십육 나한의 중심인데 옛날에는 그 세 구가 빠져 있었다. 십육 나한 중에서 또 반탁가와 벌라바사가 빠져 있어 아는 이들은 대부분 이를 흠으로 여겼다. 우리 문중의 도봉 노화상께서 암자의 일을 보신 지 8년 만에 법의 교화가 유행하여 단월들이 따랐다. 암자의 일 중에 크거나 작거나 점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기물과 세간에 이르기까지 다 조치하여 윤기가 나게 하셨다. 참으로 모든 일이 폐했다가 한꺼번에 일어났으나 영산전 일에만은 미치지 못하여 도량이 면목이 없었다. 이로부터 병오년 7월 19일 경신에 재계하고 신에게 아뢰었다. 장인에게 명하여 일을 시작한 지 20일이 족히 되자 새로 조성한 다섯 불상과 한 보살상과 나한상 각각 두 개가 이루어졌다. 그 나머지 나한 역시 모두 다시 수리하여 마침내 부처님과 보살상을 받들어 중심 자리에 놓았다. 나머지도 각기 소목에 의거해 차례대로 앉히니 밝디밝고 성대하게 모여 마치 서로 짝이 되는 즐거움이 있는 듯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자 암자의 탄경이 와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했다.
나는 그와 함께 앉아서 말하였다. “경아! 모든 불사는 조성하는 일이든 받드는 일이든 모두 복과 이익이 있다. 조성하는 노고는 이미 화상께서 몸소 하셨고 받드는 책임은 그대들에게 달려있다.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가령 화상께서 들었다면 반드시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탄경이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장로님의 간곡한 정성을 입었으니 삼가 마음에 지니고 잃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그 일을 써서 그를 돌려보냈다. 일을 처리한 사람은 국영과 원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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