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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악집-충효암 중창기

『인악집(仁嶽集)』은 인악 의첨(仁嶽義沾, 1746~1796) 스님의 문집이다. 『인악집』은 3권 1책으로 제자 성안(聖岸) 스님이 간행하였고,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이 서문을 작성하였다. 서문의 기록과 권말의 간기를 통해 1797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악 대사는 경상도 성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비슬산 용연사(龍淵寺)로 출가하고, 22세에 벽봉 덕우(碧峰德雨)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주로 은해사와 동화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강백(講伯)으로 활동하며 많은 사기(私記)를 지었고,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창건 당시 정조의 명으로 증명 법사가 되어 의식을 주재하였다. 비슬산 명적암(明寂菴)에서 입적하였다. 인악 대사의 생애는 동화사에 세워진 〈인악대사비〉(1808)와 『인악집』 권3에 수록되어 있는 행장에 자세히 전한다. 「충효암 중창기(忠孝菴重創記)」는 『인악집』 권2에 실려 있다. 인악 대사가 은해사 운부암에 주석하면서 충효암의 중창 내력을 소상히 알고 있어서 여량문(麗樑文, 상량문)을 지어 축하하였는데, 충효암 주지 자암(紫巖) 화상이 기록으로 남겨 달라고 요청하여 작성한 글이다. 충효암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운부암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은해사에 속한 암자였을 것이다. 글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정조 8년(1784) 10월 4일 밤에 충효암에 불이 나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흩어지려 하는데 주지 자암(紫巖) 화상이 간곡하게 중창하자고 권하니 대중들이 감동하여 분발해서 중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인악집』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동국대학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에서는 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본의 서지와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원문
忠孝菴重創記 今上八年十月四日夜。忠孝庵火。眠僧驚起。蒼黃跳出。僅以身免。衣鉢悉灰燼。收拾餘魂。將魚鳥散。菴主紫巖和上。撫慰衆僧。諭以重剏。意繼以涕泣。衆爲之感奮。於是召工始事。人多言。方冬日短風寒。可且候來春。和上皆不聽。曰性眂事。曰周鳩財。曰甫掌出納。曰澄叅指撝。莫不唯命。周所得財不足。以當什一。和上又親爲募緣。凡有動作。和上自服勞。衆樂爲用。未數月而大役已竣。唯方丈及樓各一間仍舊。餘皆新搆。突兀弘緻。有勝舊制。及翼年春。而窓櫳焉。廊舍焉。種種鋪置。以至端陽日。落成之時。余在雲浮習知其事。甞爲和上。作麗樑文以賀之。是年冬和上語余曰。吾菴舊無記。土人言。是新羅時開。敬順王甞駐蹕於此。此無所徵。而忠孝爲扁。抑何所据。以今觀之。杳如羲皇。畫前事想。中間屢經重葺。而樑間文今火矣。又不可攷。可慨也已。今日之勞。余何敢自居。而如無書。恐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子爲我記之。余曰。諾。然公不聞。圓覺之爲伽藍乎。寂滅爲宮。般若爲門。解脫爲床。無向背。無間架。無垣墻。亦無結搆法斧鑿痕。此釋尊所以立之於一竿脩竹上者也。彼之不爲而顧以是自多耶。和上撫掌大笑曰。誠有是事。
번역문
충효암 중창기 금상 8년 10월 4일 밤 충효암에 불이 났다. 잠자던 스님들이 놀라 일어나 황급히 뛰쳐나와 겨우 몸만 면했고 옷과 발우는 모두 재가 되었다. 남은 정신을 수습하고는 모두 물고기와 새처럼 흩어지려 하였다. 충효암의 주지 자암 화상이 여러 스님을 위로하면서 중창하자고 타이르길 눈물로써 뜻을 잇자 대중들이 그에 감동하여 분발하였다. 이에 장인을 불러 일을 시작하자 사람들 대부분이 말하길 겨울이 되어 해가 짧고 바람이 차니 시절이 봄이 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화상은 모두 듣지 않고 성은 일을 처리하고, 주는 재물을 모으고, 보는 출납을 맡고, 징참은 지휘하라 이르니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주가 얻은 재물이 부족하여 10분의 1씩 할당하고 화상께서 또 몸소 모연하였다. 모든 할 일이 있으면 화상께서 몸소 수고를 하시자 대중들이 기꺼이 일을 하였다. 수개월이 되지 않아 큰 역사가 끝났다. 방장과 누대만은 각각 한 칸으로 옛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지은 것으로 우뚝하고 크고 견고하여 옛날에 지은 것보다 나았다. 다음 해 봄이 되자 창과 창살을 만들고 행랑채를 짓고 갖가지를 배치하여 단오에 이르러 낙성식을 하였다. 나는 운부에 있어서 그 일을 익숙히 알았기에 화상을 위하여 여량문을 지어 축하하였다. 그해 겨울 화상이 나에게 말하길 “우리 암자는 옛 기록이 없다네. 토박이들은 신라 때에 개창되어서 경순왕이 여기에서 출행을 멈춘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증명할 길이 없소. 그런데 충효로 편액 하였으니 무엇을 의거한 것인가? 지금으로서 본다면 아득하기가 희황 때와 같다네. 앞의 일을 생각해보면 중간에 자주 보수를 거쳤는데 상량문이 지금 불에 타서 또 고증할 수 없으니 개탄스럽네. 금일의 노고를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자처하겠는가? 그러나 만일 글이 없다면 뒷날에 오늘을 보는 것 역시 오늘 우리가 옛날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자네는 나를 위해 그것을 기록해주게.”라고 하여 내가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듣지 못했습니까? 원각은 가람이 되고 적멸은 집이 되며 반야는 문이 되고 해탈은 침상이 되며 앞과 뒤도 없고 칸과 시렁도 없으며 담도 없고 또한 결구도 없으며 법의 도끼로 흔적을 파니, 이것이 석존께서 하나의 긴 대나무 장대 위에 세운 이유입니다. 저가 하지 않았는데 도리어 이것으로써 스스로를 자랑하겠습니까?” 화상께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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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악집 01(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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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악집 표지(동국대 중앙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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