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휴정의 생애

서산대사 진영ⓒ국립중앙박물관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본관은 완산(完山), 속성은 최(崔), 속명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이며 휴정은 법명이다.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거처하여 서산(西山)이라 불리는 외에 별호로 백화도인(白華道人) · 풍악산인(楓岳山人) · 두류산인(頭流山人) · 묘향산인(妙香山人) · 조계퇴은(曹溪退隱) · 병로(病老) 등이 있다. 고조부가 태종 대에 용호방(龍虎榜)에 올라 창화(昌化: 현재 경기도 양주)로 옮겨가서 살았기 때문에 창화를 고향이라 하기도 한다. 부친 세창(世昌)은 향시에 합격[鄕擧]하여 기자전감(箕子殿監: 평양에 있었던 기자 사당을 관리하는 벼슬)을 잠시 지냈으나 사양하고 향관(鄕官) 벼슬로 생을 마쳤다. 모친은 한남(漢南) 김씨로 늘그막에서야 휴정을 낳았다. 외조부인 현감(縣監) 김우(金禹)가 연산군 때에 득죄(得罪)하여 안릉(安陵)에 귀양 가서 살았기에 그 후대는 안주(安州) 사람으로 불린다.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글
휴정(休靜)의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글로는 1606년에 유정(惟政), 해안(海眼), 명조(明照), 언기(彦機), 쌍흘(雙仡) 등이 지은 청허당보장록(淸虛堂寶藏錄)이 있다. 휴정의 행적과 가르침을 기록한 짤막한 이 글은 주로 다른 불교 서적의 말미에 필사되어 전한다. 다음으로는 문인 편양 언기(鞭羊彥機, 1581~1644)가 지은 「금강산퇴은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사자 부종수교 겸 등계보제대사 청허당행장(金剛山退隱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賜紫扶宗樹敎兼登階普濟大師淸虛堂行狀)」에 그 행적이 자세하다. 이 행장의 전반부는 휴정 스스로가 자신의 성장 과정과 출가 전후의 행적을 술회하며 노수신(盧守愼, 1515~1590)에게 부친 편지인 「상완산노부윤서(上完山盧府尹書)」를 참조한 것이다.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부기 청허당보장록ⓒ국가유산포털
용복사(龍腹寺) 1630년 발행 청허당집 내 상완산노부윤서ⓒ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또 휴정의 행적에 관해서는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와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비문(碑文)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각각 『월사집(月沙集)』 제45권에 「유명 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서산청허당 휴정대사 비명 병서(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西山淸虛堂休靜大師碑銘并序)」, 『계곡집(谿谷集)』 제13권에 「유명 조선국 사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병서(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并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정조 15년인 1791년에 서유린(徐有隣, 1738~1802)이 지은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西山大師表忠祠紀績碑)」가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전라남도 편에는 「서산대사비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고, 김낙일(金洛一)이 1795년에 지은 「서산대사행록(西山大師行錄)」 역시 같은 책에 실려 있다. 그 외에 조선왕조실록 명종 · 선조 · 정조 대의 기사, 『동사열전(東師列傳)』, 그리고 1612년(광해군4)에 단보(端甫) 허균(許筠, 1569~1618)이 쓴 서문과 1630년(인조8)에 여고(汝固) 이식(李植, 1584~1647)과 낙옹(樂翁)이 쓴 서문 등을 참조할 만하다. 이들 서문은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실려 있다. 글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으나 이들 여러 편의 글에 근거하여 휴정의 생애를 정리하면 이하와 같다.
『월사집』 청허당 비명ⓒ한국고전종합DB
『계곡집』 청허당 비명ⓒ한국고전종합DB
허균 『성소부부고』 청허당집 서문ⓒ한국고전종합DB
태몽과 출생, 유년기
기묘년(己卯年, 1519) 여름에 모친 김씨가 신기(神氣)가 고르지 못하던 중, 하루는 창가에서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공손하게 절하며 “사내대장부를 잉태하셨기에 축하 드리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친은 놀라 깨어서는 ‘이상도 해라. 우리 부부는 동갑 갑오생(甲午生, 1474)으로 나이 50이 가까운데 어찌 이런 꿈을 꾸었을까.’라며 의아해하고 민망해하며 근심하였다. 그 꿈대로 임신하여 이듬해 경진년(庚辰年, 1520) 3월에 휴정을 낳았다. 휴정 3세 때인 임오년(壬午年, 1522) 사월 초파일 낮에는 부친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특별히 작은 사문을 찾아왔습니다.”라 하고는 두 손으로 휴정을 들어 올리고 주문 몇 마디를 외우고 내려놓더니 휴정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운학(雲鶴)이라는 두 글자로 너의 이름을 삼으니 소중히 하라.”라고 하였다. 부친이 운학이라 지은 뜻을 묻자 노인은 “이 아이의 일생의 행적이 바로 운학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오.”라 답하였다. 불행히도 휴정의 나이 9세 때(1528)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봄에는 부친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시와 문장에 능했던 휴정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고을 원님 이사증(李思曾)이 휴정을 불러 저 멀리 눈 덮인 소나무 숲을 가리키며 ‘자신이 운자(韻字)를 떼면 시 구절을 지어 볼 수 있겠느냐?’라면서 비낄 사(斜) 자 운을 떼자 휴정은 “향기 가득한 높은 누각에 석양이 깔리는데[香凝高閣日初斜]”라 하였고, 다시 꽃 화(花) 자 운을 떼자 “천리 강산에는 꽃 같은 눈이 쌓였어라[千里江山雪若花]”라고 하였다. 이때 휴정의 나이 10세였다.
유학(儒學) 공부와 출가의 길
얼마 지나지 않아 원님이 12세인 휴정을 한양으로 데리고 가 성균관[泮宮]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공부에는 힘쓰지 않고 배회하던 어느 날 늙은 학사(學士)가 휴정을 보고 자신은 휴정의 선친과 친분이 있는 사이로서 외면할 수가 없다며 서당 두서너 칸을 세우고 제자 대여섯을 모아 학업에 정진하도록 이끌었다. 삼 년 동안 좋은 스승을 택하여[擇師] 공부하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거듭 낙방하였다. 이후 지리산 등 산천을 돌아다니던 중 ‘마음을 비우고 급제한 자[心空及第者]라야 대장부’라는 구절을 접하고는 이전에 배웠던 것들이 한낱 허명에 지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21세 때인 경자년(庚子年, 1540)에 숭인(崇仁) 장로에게서 머리를 깎고 일선화상(一禪和尙)에게서 수계를 받고 석희법사(釋熙法師)와 육공장로(六空長老)와 각원상좌(覺圓上座)를 증계사로 모셨으며,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밑에서 교법을 들었다. 이후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默) 대사를 찾아뵈었는데 대사는 휴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가해 주었다. 다시 두류산 삼철굴(三鐵窟)에 들어가 세 여름을 지내고, 대승암(大乘庵)에 들어가 두 여름을 지냈으며, 의신암(義神庵) · 원통암(圓通庵) · 원적암(圓寂庵) · 은신암(隱神庵) 등 여러 암자에서 수삼 년 가을을 보냈다. 하루는 용성(龍城: 현재의 남원) 역성촌(歷星村)에서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게송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한 수 중에 “이제야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대장부가 해야 할 일을 마쳤네.[今聽一聲鷄, 丈夫能事畢.]”라는 구절이 있다. 병오년(丙午年, 1546) 가을에 별안간 유행(遊行)할 마음이 일어 표주박 하나, 납의 한 벌로 멀리 관동의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냈다. 또 풍악산에 들어가 미륵봉을 둘러보고 구연동(九淵洞)에 머물며 한 차례 하안거를, 향로봉(香爐峰)에서 또 한 차례 하안거를 지냈으며, 성불암(成佛庵) · 영은암(靈隱庵) · 영대암(靈臺庵) 등 여러 암자에서 한 차례씩 하안거를 보냈다. 그리고 함일각(含日閣)으로 옮겨 가을 한철을 지냈다.
승직(僧職) 수행(遂行)과 출가자로서의 삶, 그 사이에서
명종 5년(1550) 12월 15일에 선교 양종을 복립하라는 명[命復立禪敎兩宗]이 내려졌고 휴정은 이듬해 30세 때에 선과(禪科)에 합격하였다. 명종 10년(1555) 여름에 처음 교종(敎宗)의 판사(判事)에 임명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또 선종(禪宗)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정 옥계에게 올린 글[上鄭玉溪書]」에 따르면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로 있을 때 윤춘년(尹春年, 1514~1567)과는 허물없이 친분을 맺은 사이로 1557년 봄에는 그에게서 『두시(杜詩)』를 빌리고 휴정은 그에게 『화엄경』을 빌려주어 서로 바꾸어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명종실록』 14권(명종8, 1553)에는 윤춘년이 휴정과 절교하였다는 기사가 있어 그 사실 여부나 선후를 단정하기 어렵다. 1556년 37세의 휴정은 “내가 출가한 본래 뜻이 어찌 이런 것들에 있겠는가!”라고 탄식한 끝에 1557년 겨울에 인수(印綬)를 풀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반년 동안 지냈다. 「이 유부에게 올린 글[上李兪拊書]」에 따르면 선교양종판사로 있을 무렵부터 건강이 안 좋던 휴정은 그 무렵 또 안질(眼疾)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이듬해인 1558년에는 두류산(頭流山)으로 향하였고 내은적암(內隱寂庵)을 새로 짓기 위해 모연(募緣)하며 이곳에서 3년을 지냈다. 그러고는 다시 황령암(黃嶺庵) · 능인암(能仁庵) · 칠불암(七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3년을 지내고는 태백산 · 오대산 · 풍악산 등을 답산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보현사(普賢寺) 관음전과 내원암(內院庵) · 영운암(靈雲庵) · 백운암(白雲庵) · 심경암(心鏡庵) · 금선암(金仙庵) · 법왕암(法王庵) 등을 돌아다니며 바람과 구름 같은 생활을 하였다. 금강산으로 돌아와 <삼몽사(三夢詞)>를 지었는데 이 시는 「완산 노부윤에게 다시 올리는 편지[再答完山盧府尹書]」에도 실려 있다. 시는 이러하다.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하고 主人夢說客 손님은 주인에게 꿈 이야기하네 客夢說主人 지금 두 꿈을 이야기하는 손님 今說二夢客 또한 꿈속의 사람일 뿐이라네 亦是夢中人 57세이던 1576년에 「제부모문(祭父母文)」을 지었는데 “아무개는 묘향산 심원동(深源洞) 상남대(上南臺) 초암에 앓아누웠기에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사람을 보내 부모님의 쌍묘(雙墓) 앞에 삼가 아룁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휴정은 산천과 암자를 그저 떠돈 것이 아니라, 여러 기문(記文)과 모연문, 서발문(序跋文) 등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지었음을 『청허당집』에 수록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노년의 시련
휴정은 조선 전기 순천 출신의 무관인 옥계(玉溪) 정승복(鄭承復, 1520~1580)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허당집』에만 그와 관련된 시 2편과 서신 3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동년배인 그에게 회갑을 맞은 경진년(庚辰年, 1580) 설날에 ‘경진생 청허자가 경진생 옥계자(玉溪子)에게 올린다’며 서신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또한 늙고 병듦에 대한 탄식을 토로한 글이 『청허당집』에 여러 편 실려 있는데 휴정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오대산 일학 장로(一學長老)에게 부친 글에서 휴정은 “나는 59년 동안의 잘못을 깨닫는 나이(60세)를 2년이나 넘겼으나, 쇠하고 병든 것이 해마다 심해지고 달마다 심해지고 날마다 심해지고 때마다 심해지니,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지난번에는 연수(延壽)의 권유로 남방에 가서 3년 동안 머물렀고, 지금은 또 민사(敏師)의 초청으로 2월 보름에 남방을 떠나 3월 보름에 불귀사(佛歸寺)에 들어왔는데, 온갖 병마(病魔)가 번갈아 침노하는 바람에 침상에 엎드리는 것을 일삼고 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라며 오랫동안 시달려온 병마의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1589년 기축사화(己丑士禍) 때에 승려 무업(無業)이 향로봉에서 지은 휴정의 시를 빌미로 무고(誣告)하여 의금부에 잡혀갔다.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는 이러하다. 온 나라 도성들 마치 개미집 같고 萬國都城如蟻垤 일천 집 호걸들도 흡사 하루살이 같구나 千家豪傑若醯鷄 창가 밝은 달 베고 맑고 텅 빈 속에 누웠으니 一窓明月淸虛枕 솔바람 끝없는데 그 소리 고르지 않네 無限松風韵不齊 그러나 휴정의 해명[招辭]이 명쾌하고 간절함을 임금이 알아보고 “상인(上人)께서 깊은 산에 은거하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요망한 일을 했겠는가?”라며 즉시 방면하게 하고 휴정의 시집을 직접 구해 살펴보신 다음 어필로 묵죽(墨竹) 한 폭을 그려 주며 위로하셨다.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1590) 기사에 “성희(性熙)는 본시 미친 중이었다. … 성희는 실지로 정여립(鄭汝立)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기 때문에 옥사를 꾸밀 수 있었던 것이다. 성희는 승도(僧徒)들을 끌어댔는데 대부분 자기와 감정이 있었던 사람들로서 향산(香山)의 승통(僧統) 휴정도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휴정에게는 저서가 있었는데 문장이 단아하고 대부분 임금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임금은 즉시 석방하게 하고 어서(御書)인 당시절구(唐詩絶句)와 묵죽 한 장을 하사하여 위로하고서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충북 보은 법주사(法住寺) 선조대왕 어필 병풍ⓒ국가유산포털
승병장으로서의 활약
휴정 나이 73세이던 임진년(1592)에 왜적이 남경(南京)인 한양, 중경(中京)인 개성, 서경(西京)인 평양 등 삼경(三京)을 함락하자 대가(大駕)가 서쪽 용만(龍灣: 평안도 의주)으로 옮겨갔다. 임금께서는 휴정을 떠올리고 좌우의 대신에게 물었다. “아무개 상인(上人)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나를 잊었단 말인가? 빨리 불러서 오게 하라.” 스님이 와서 주렴 밖에 앉자, 지시를 내려 “시국이 이처럼 위태로우니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시고 팔도십육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捴攝)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와 말을 타고 순안(順安) 법흥사(法興寺)에 이르러 승도(僧徒)를 모아 천병(天兵)을 도왔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기사에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의 옛 승관(僧官) 휴정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總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本道)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라고 한다. 휴정 자신도 문도 1500인을 이끌고 중국 군사를 따라 진격해서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 경성을 수복하고 나서 임금이 장차 대가(大駕)를 돌리려 할 적에 휴정이 승병 수백 인을 이끌고 호가(扈駕)하며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임금에게 “신의 나이 여든에 가까워 근력이 다했으니, 군사(軍事)를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은 도총섭의 인수(印綬)를 반납하고 묘향산의 처소로 돌아갈까 합니다.”라고 청하니, 임금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허락하고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승병장으로서 이름을 남긴 휴정이지만 좋은 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조실록』 38권 선조 26년(1593) 기사에 사헌부에서 “승려인 휴정에게도 병권을 맡기었는데, 조정의 수치가 극심합니다. 휴정은 적을 초토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방자한 마음만을 품어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앞뒤에서 호위하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타고 궁문(宮門) 밖에 이르러서는 걸어가는 조신(朝臣)들을 만나도 거만스레 벼슬아치나 재상의 체통을 보입니다. 조금도 중다운 태도가 없으니 추고하여 엄히 다스리도록 명하시어 후일을 징계하소서.”라고 아뢰는 말이 실려 있다. 또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기사 협주에서는 “휴정은 중의 우두머리로서 스스로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국난에 달려가서 참괵(斬馘)의 공이 약간 있었다. 이 뒤로는 스스로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는데 혹은 궐중(闕中)의 출입을 허락받기까지 하였다.”라고 한다. 그러나 선조는 시종 휴정의 공과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할 것을 명하였고, 「서산대사행록」에 “계사년(1593, 선조26)에 또 정예병 700명의 승려를 선발해서 도성으로 돌아오는 임금의 수레를 영접하자 선조는 여러 번 궁으로 들어오라고 명을 내리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라는 글로 보아 선조의 신임은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49권 선조 27년(1594)에는 훈련도감에서 “각도의 승군(僧軍)에 장정이 많이 있으나 흩어져 있어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군병을 이루기 어려우므로 지난번 총섭승(總攝僧) 휴정에게 이문(移文)하여 나이 젊은 승군 수백 명을 뽑아 성안으로 보내게 하여 화포(火砲)를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는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실록』 155권 선조 35년(1602)에는 비변사에서 “휴정이 도총섭(都摠攝)에서 체직된 후에 의엄(義嚴)이 그 대를 이었는데, 의엄은 총섭의 고신(告身)이 있으나 휴정은 화재를 만나 잃어버렸습니다. 이번에 유정(惟政)이 자기 스승을 위하여 본사(本司)에 호소하기를 ‘고신을 다시 만들어 스승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영남(嶺南)으로 내려가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중은 지금 한창 국사에 분주하니 원하는 바에 따라 고신을 만들어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아뢰자 선조가 윤허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30세 이후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휴정은 84세이던 1603년에 ‘외인(外人)의 간청에 못 이겨 「사바교주 석가세존 금골사리 부도비(娑婆敎主釋迦世尊金骨舍利浮啚碑)」를 짓게 되었으나 정신은 혼미하고 눈은 어두우며 손을 떨린다면서 문자도 모두 거칠어 후세의 기롱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양해를 구한다.’라는 말로 비문의 마지막 글을 맺기도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7월 1일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입적
휴정은 갑진년(甲辰年, 1604) 정월 23일에 세수 85세, 법랍 65세로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좌탈한 채로 입적하였다. 이날 폭설(暴雪)이 내리는 와중에도 가마를 타고서 가까운 산의 암자들을 두루 찾아가 부처님에게 절하고 설법한 뒤, 방장실(方丈室)에 돌아와 얼굴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추고 나서 불전(佛前)에 분향(焚香)하였다. 그러고는 붓을 잡고 자신의 화상(畫像)에 직접 제(題)하기를 “80년 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 뒤 지금은 내가 그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자찬 게송을 남기고 떠났다. 또 「서산대사행록」에 따르면 입적 즈음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내가 입적한 후에 의발을 호남의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라. 두륜산이 비록 외진 곳에 있지만 내가 보기에 삼절(三節)이 있어서 중요하게 될 것이다. 첫째, 기이한 꽃과 풀을 틈틈이 볼 수 있는 경치가 있고, 비단과 곡식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며, 북쪽의 월출산(月出山)은 우뚝 솟아 있는 하늘 기둥이요, 남쪽의 달마산(達摩山)은 서리서리 얽혀 있는 땅의 중심축이며, 동쪽의 천관산(天冠山)과 서쪽의 선은산(仙隱山)은 위엄 있게 서로 마주보고 있고, 바다와 산악이 다섯 방위에서 지키고 있으며, 계곡이 깊고 조용하니, 이곳은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을 땅이다. 둘째, 왕의 교화가 천리에 미쳐야 하지만 아직 여기에 이르지 않았다. 나의 공적은 칭찬할 만한 것이 없지만 임금이 베풀어 주신 특별한 은혜를 이로 인해 보게 되고 느끼게 된다면 후대에 어찌 교화의 바람 소리를 심어서 어리석은 풍속을 경계하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셋째, 처영(處英)과 여러 제자들은 모두 남쪽에 있고 이곳은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이다.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너희들은 내가 부탁한 말을 어기지 말고 나의 의발과 임금께서 하사하신 대선사 교지를 두륜산에 옮겨 보관하라.” 명조(明照)에게 이 일을 주관토록 하고, 유정에게 편지를 보내어 후사를 부탁하였다.
평북 영변 보현사(普賢寺) 서산대사탑비ⓒ국립중앙박물관
평북 영변 보현사(普賢寺) 서산대사 영정ⓒ국립중앙박물관
입적 후의 추모와 상훈
입실 제자 원준(元俊)과 인영(印英) 등이 다비하고 여러 조각의 사리를 수습하였다. 그중 한 조각은 원준 등이 얻은 금강사리 두 과(顆)와 함께 보현산 서쪽 안심사(安心寺)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는데 나옹왕사(懶翁王師)와 같은 등급이었다. 다른 한 조각은 자휴(自休) 등이 금강산으로 가져가 분향하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또한 신령한 구슬 여러 매로 응하여 나타났는데, 유점사(楡岾寺) 북쪽에 있는 석함에 모셨다. 『동사열전』에서는 “제자는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학을 양성한 일방종주(一方宗主)만도 네다섯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1544~1610)이 입적한 후 8년이 되던 1618년에 문인들의 호소로 임금이 출생지인 밀양 재약사(載藥寺)에 특별히 사당을 세우게 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그의 스승 서산대사도 그곳에 함께 배향하게 하였다. 문인 언기(彦機), 의경(儀冏), 쌍흘(雙屹) 등이 월사 이정구에게 비명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1631년에 비석을 세웠다. 문인 태능(太能), 원철(圓徹), 해안(海眼) 등이 계곡 장유에게서 받은 비명으로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비석을 세웠으며, 임신년(인조10, 1632) 가을에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였는데 휴정이 임종할 때 남긴 말에 따른 것이다. 휴정이 입적한 지 185년이 지난 1788년, 『정조실록』 26권(정조12) 기사에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중 휴정의 사적이 고(故) 재상 이정귀와 장유가 지은 비문에 실려 있는데, 비문에 ‘서산대사가 임진왜란[龍蛇之難] 때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자 선묘(宣廟)께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으로 삼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때 내리신 선묘의 교지(敎旨)와 의발(衣鉢)이 호남 대둔산(大芚山)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例)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이어 표충(表忠)이란 두 글자의 편액(扁額)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포장(褒奬)하는 뜻에 부합됩니다.”라고 아뢰자 임금이 윤허하였다고 한다. 『동사열전』과 「서산대사비문」에도 휴정의 7세 법손인 천묵(天黙) 등이 대둔사 남쪽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휴정의 화상(畵像)을 걸어 그 신주(神主)를 모시고자 이에 발에 물집이 생기도록 걸어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함에 임금이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하라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사명당(四溟堂)과 뇌묵당(雷默堂)을 좌우에 배향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표충사(表忠祠)ⓒ전남 해남 대흥사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 서산대사휴정 가증 교지ⓒ국립중앙박물관
평북 영변 보현사(普賢寺) 수충사ⓒ국립중앙박물관
또 정조는 이듬해 1789년(정조13) 4월에 제문(祭文)을 내리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문은 승지(承旨)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지었으며 제문의 마지막 글귀는 “삼가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당 선사와 우세존자(佑世尊者) 뇌묵당 선사를 좌우에 모시고 음식을 올려 배향합니다.”이다. 정조는 친히 명문(銘文)을 지어 내리기도 하였다. 정조가 지은 서산대사 화상당의 명문 병서[正宗大王御製西山大師畵像堂銘并序]에 “내가 서쪽과 남쪽 도신(道臣)의 요청에 따라 그 영당(影堂)에 편액을 내리되, 남쪽은 표충(表忠)이라 하고 서쪽은 수충(酬忠)이라고 하는 한편, 관원에게 명하여 제수(祭需)를 지급해서 매년 제사 지내도록 하였다. 금년이 갑인년(정조18, 1794)이므로 홍무(洪武) 갑인년(공민왕23, 1374)에 선세(善世) 선사(명나라 초기의 인도 선승)에게 시를 하사한 고사를 추억하며 서(序)와 명(銘)을 지어서 영당에 걸게 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 명문 2벌 가운데 하나는 두륜산 표충사에 내려보내고, 다른 하나는 묘향산 수충사로 내려보냈다. 「수충사사제문(酬忠祠賜祭文)」에 “건륭(乾隆) 59년(정조18, 1794) 갑인년 4월 초파일에 국왕은 공조정랑(工曹正郞)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승응조(承膺祚)를 보내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 증표충선사(贈表忠禪師) 휴정(休靜)의 영(靈)에 제사하노라.”라 하였고, 『정조실록』 39권(정조18, 1794)에도 “평안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의 요청에 따라 묘향산 서산대사 휴정의 사당에 수충사(酬忠祠)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동시에 제위전(祭位田)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법맥과 문하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의 18대 손인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으로부터 그 법맥의 기점을 잡는다.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이후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양대 문파로 법맥이 계승되었는데, 휴정은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에게 전했고 선수는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에게 전하였다.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구곡 각운(龜谷覺雲, 생몰년 미상)→벽계 정심(碧溪淨心, 생몰년 미상)→벽송 지엄(碧松智儼, 1464~1534)→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풍담 의심(楓潭義諶, 1592~1665)→환성 지안(喚惺志安, 1664~1729)→함월 해원(涵月海源, 1691~1770)→영파 성규(影波聖奎, 1728~1812) 등으로 이어졌다. 휴정 문하에서는 4대 문파가 형성되었는데,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하의 사명파,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하의 편양파,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 하의 소요파, 정관 일선(靜觀一禪, 1533~1608) 하의 정관파를 꼽는다. 이들 4인 외에 이름난 제자로는 청매 인오(靑梅印悟, 1548~1623), 완허 원준(玩虛圓俊, 1530~1619), 현빈 인영(玄賓印英), 기암 법견(寄巖法堅, 1552~1634), 무염 성정(無染性凈), 보응 해일(普應海日, 1541~1609), 청련 자휴(靑蓮自休), 향봉 행주(香峯幸珠), 정관 일선(靜觀一禪, 1488~1568), 백련 덕운(白蓮德雲), 보진(葆眞), 쌍흘(雙屹), 제월 경헌(霽月敬軒, 1544~1633), 영월 청학(詠月淸學, 1570~1654), 송헌 희감(松軒熙鑑), 호영 옥정(湖影玉晶), 무영 영숙(無影靈淑), 허영 장륙(虛影莊六), 보감 보희(寶鑑寶熙), 중관 해안(中觀海眼, 1567〜?), 진묵 일옥(震默一玉, 1562~1633), 휴운 담언(休雲曇彦), 취운 학린(翠雲學璘, 1575~1651), 취진 의영(醉眞義瑩), 추월 은휴(秋月隱休), 관매 설매(觀梅雪梅), 응화 진일(應化眞一) 명진 수일(冥眞守一, 1683~1743), 기허 영규(騎虛靈圭, ?~1592), 무염 계훈(無染戒訓) 등이 있다.
유학자들과의 교류
휴정이 방백(方伯), 학관(學官), 수재(秀才), 학사(學士), 처사(處士), 학록(學錄), 상사(上舍), 안렴사(按廉使) 등은 물론 삼정승을 지낸 고관 벼슬아치들과 주고받은 시와 서신 여러 편이 『청허당집』에 전한다. 이 가운데 이름자를 확인할 수 있는 몇몇 인물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溟) 조식(曺植, 1501~1572)을 꼽을 수 있는데, 『청허당집』에 「퇴계의 책에 쓰다[書退溪卷]」, 「퇴계 상국에게 올린 글[上退溪相國書]」, 「남명 처사에게 올린 글[上南溟處士書]」 등이 실려 있다. 『연경재전집속집(硏經齋全集續集)』 「제청허당액후(題淸虛堂額後)」에 따르면 휴정이 묘향산 내원암에 거처할 때 퇴계가 ‘향산운사(香山雲舍)’라고 편액을 써서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가 글씨를 쓴 청허당 편액도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퇴휴당(退休堂) 소세양(蘇世讓, 1486~1562), 보진재(葆眞齋) 조욱(趙昱, 1498~1557), 윤춘년(尹春年, 1514~1567),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이암(頤菴) 송인(宋寅, 1517~1584), 창해(滄海) 양사언(楊士彦, 1517~1584), 옥계(玉溪) 정승복(鄭承復, 1520~1580),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 1524~1580), 유곡(柳谷) 이헌국(李憲國, 1525~1602), 이식(李拭, 생몰년 미상), 윤언성(尹彥誠, 생몰년 미상), 임진왜란 때 활동한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무신 김억령(金億齡, 생몰년 미상) 등 다수의 인물과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휴정은 특히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에 대한 두터운 흠모의 정과 존경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고운의 글자를 모아서 시를 짓다[集孤雲字]」, 「최고운도(崔孤雲啚)」, 「최고운의 바위에 제하다[題崔孤雲石]」라는 시와 「지리산 쌍계사 중창 기문[智異山雙谿寺重創記]」 등에 잘 표현되어 있다. 휴정은 유불도에 정통하고 삼교의 조화를 꾀했던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서산대사 휴정의 기이한 설화
이에 대해서는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8) 참조. 서산대사설화

관련기사

불교용어

관련자료

  • 도서 범해 각안(梵海覺岸), 김두재 역 | 동국대학교출판부 | 2015 상세정보 출처
  • (정선) 휴정
    도서 휴정; 대한불교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 대한불교조계종 | 2010 상세정보
  • 청허당집
    도서 휴정; 박경훈; 동국역경원 | 동국대학교 부설 역경원 | 1993 상세정보
  • 더보기  +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