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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경연의술문찬 소개

『 무량수경』의 동아시아 4대 주석 중 하나 - 신라 경흥의 주석서
조선불교총서 『무량수경연의술문찬』 필사본ⓒ불교학술원
문헌 제목 풀이
『무량수경(無量壽經)』은 『아미타경(阿彌陀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더불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중의 하나이다. 아미타불이 법장 비구로서 수행하던 시절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그에 따른 수행을 함으로써 성불하여 서방 극락정토를 건설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문헌은 『무량수경』에 대한 혜원(慧遠), 원효(元曉), 법위(法位) 등 여러 주석을 모아 그 해석을 논평하고, 경전의 가르침을 풀어 서술하고 찬탄하는 책이다[連義述文贊]
문헌 맛보기
만약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시방세계의 중생이 정성스런 마음으로 믿고 좋아하면서 저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하여, 열 번 칭념하였는데도, 저의 국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오역죄를 짓고 정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할 것입니다. - 『무량수경』48원 중 제18원
그런데 그 경 『관무량수경』에서 “오역죄를 지은 이도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은, 이 경 『무량수경』의 서원에서 “오직 오역죄를 짓고 정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한다.”라고 한 것과 어긋난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의 교설을 회통하여 해석하였다. · 지금 곧 이 경 『무량수경』의 해당처는 상품의 삼생에 해당하는 중생을 섭수하는 것을 설한 것인데 이들 가운데에는 반드시 오역죄를 짓는 이가 없기 때문에 오역죄를 지은 이를 제외해야만 한 것이고, 그 경 『관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을 설했으니, 비록 오역죄를 지었어도 열 번을 모두 칭념하면 또한 왕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경의 문장의 의미가 서로 어긋나지 않게 회통하여 풀이할 수 있다. 이를 힐난하여 "중품의 삼생도 또한 오역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오역죄를 지은 이를 제외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보리심을 발하고 여러 공덕을 닦는다.”라고 했으니, 곧 오역죄를 짓지 않는 뜻이 이것을 통해 이미 드러났기 때문이다.
저자
경흥(璟興, 620~?)
620년 백제 지역인 웅천주(熊川州) 수씨(水氏) 집안에 태어났다. 18세에 출가하여 삼장에 통달하여 덕망이 일시에 퍼졌다. 당시 웅천주는 백제불교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웅천주는 오늘날의 공주로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당나라의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어 그 지배하에 있었고 문무왕대(675년)에는 도독부가 물러나고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제에서 두루 불법을 공부하고, 40세경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에 편입될 때 백제 유민으로 잔류했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사상에서 백제불교의 영향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81년 문무왕은 경흥을 국사(國師)로 임명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신문왕은 그를 국로(國老)에 임명하고 삼랑사에 머물게 했다. 당대 원효・의상 등의 신라 출신 고승대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로로 모신 이유를 그의 출신 배경이 백제였다는 것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곧 문무왕 즉위 이후 웅진주를 중심으로 백제의 항거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스님들은 항쟁 운동의 선봉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웅진주 출신의 덕망 있는 스님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 자신은 반대에 부딪혀 국사로 임명하는 것에 실패하고 유언을 남겨 자신의 우려를 불식시키려 했다. 국사로 임명할 것을 명했지만 그 격이 조금 낮은 것으로 판단되는 국로로 임명한 것은 신문왕 역시 많은 반발에 부딪쳤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국로로 임명된 경흥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 현재 전해지는 자료에 수록된 두 편의 일화 중 관음현신(觀音現身)은 그가 근심으로 병에 걸렸다가 관음의 자비에 의해 치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문수현신(文殊現身)은 화려하게 장엄한 말을 타고 다니는 것과 같이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문수의 경계를 받은 후 청정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자료는 그가 백제의 유민으로서 신라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신라인의 반발에 부딪친 것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된다. 곧 병의 치유라든가,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의 경책이라든가 하는 것이 모두 무명의 스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국로로서의 경흥의 지위에는 부합하지 않는 면모가 있는데, 이는 신라 승단에서 경흥의 지위를 격하시키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발 속에서도, 그가 근심으로 병이 들었다는 것은 고원한 수행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세속의 일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는 삶을 살았음을 보여주고, 또한 왕궁의 출입이 잦았다는 것은 신라 왕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음을 보여준다. 아래는 『삼국유사 』[1]경흥의 행적을 담은 기록으로 『삼국유사』「경흥우성조(憬興遇聖條)」, 『법화영험전』「顯比丘尼身條」가 현존한다.에 실린 일화 두 편을 정리한 것이다.
경흥의 성운 수(水)이고, 백제 지역 웅천주(熊川州) 출신이다. 18세에 출가하고 삼장(三藏)에 통달하여 명망이 높았다. 681년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임종하면서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에게 경흥을 국사로 삼을 것을 고명(顧命)하였다. 신문왕은 즉위하여 고명과는 달리 경흥을 국로로 삼고 삼랑사에 주석하게 하였다. 경흥은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한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어떤 비구니가 찾아와 법사의 병은 근심에 의해 생겨난 것이니, 웃음에 의해서만 치료할 수 있다고 하고, 스스로 11가지 모습을 짓고 그때마다 익살스런 춤을 추었는데 매우 우스웠다. 경흥의 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았다. 비구니는 문을 나가 남항사(삼랑사 남쪽에 있던 절)로 들어간 후 사라졌는데 지니고 있던 지팡이가 탱화 십일면원통상(관음상) 앞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 경흥이 왕궁에 들어가게 되어서 시중을 드는 이가 화려하게 장엄한 말을 끌고 와서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형색이 초췌한 사문이 지팡이를 짚고 말린 물고기를 담은 광주리를 짊어지고 하마대에서 쉬고 있었다. 시중을 드는 이가 “출가자의 옷을 입고 어찌 신분에 저촉되는 물건을 지니고 다니느냐.”라고 꾸짖자 스님은 “넓적다리 사이에 생고기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일쯤이야 어찌 싫어할 만한 일이라 하겠는가?”라고 했다. 경흥이 문을 나오다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따라가 보게 했더니, 남산 문수사의 문밖에서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는데, 지팡이가 문수상 앞에 있었고 말린 물고기는 바로 소나무 껍질이었다. 경흥이 자초지종을 듣고 “대성께서 내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구나.”라고 하고 종신토록 말을 타지 않았다.
저술
경흥은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원효・태현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경흥의 저술 목록은 다음의 경록에서 전한다.
『법상종장소(法相宗章疏)』T55, No. 2180. 914년 일본의 동대사 평조(平祚)가 찬술했다.
『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T55, No.2183. 1094년 일본 흥복사 영초(永超)가 찬술했다. KABC 동아시아 한국불교사료: 일본문헌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T55, No. 2184. 1090년 고려의 의천(義天)이 찬술했다. KABC 신편제종교장총록
이 중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 『금광명최승왕경약찬(金光明最勝王經略贊)』이 현존한다.[2]『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 3권 (T37, No. 1748.)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 1권 (T37, No. 1774) 『금광명최승왕경약찬(金光明最勝王經略贊)』 5권 (대장경 미수록본으로 대정신수대장경간행회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김상현이 여러 서적에서 인용된 것을 근거로 하여 집일한 『집일금광명최승왕경경흥소(輯逸金光明最勝王經憬興疏)』가 있다. 이 가운데 『금광명최승왕경약찬』은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삼미륵경소』는 미륵삼부경에 대한 독립된 주석서인 『미륵상생경요간기』・『미륵하생경소』・『미륵하생경소』・『미륵성불경소』 등을 1권으로 합본한 것이다.
구성과 내용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졌는데 권상과 권중은 『무량수경』 상권에 대한 해석을 담았고 권하는 『무량수경』 하권에 대한 해석을 담았다. 내용으로는 삼문으로 『무량수경』을 풀이하였다. 첫째 『관무량수경』과 『무량수경』의 관계를 유래한 뜻으로 풀었다. 둘째 『무량수경연의술문찬』의 대본의 문제를 제목을 풀이함에서는 밝혔다. 셋째 본문을 풀이하였다.
1) 유래의 뜻
유래의 뜻이란 특정 경전·품 등이 특정 시기에 설해진 이유 혹은 특정 위치에 놓인 이유 등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무량수경』이 『관무량수경』 뒤에 설해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정토의 소인(所因)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관무량수경』에서 정토왕생을 위한 십육관법(十六觀法)을 설한 가운데 제7 화좌관(華座觀)에서 화좌가 비록 법장 비구의 원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기는 했지만, 아직 극락정토의 의보와 정보의 장엄이 모두 법장이 세운 본서(本誓)의 힘으로 완성된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본경에서 숙세에 세운 사십팔원을 자세히 설하여 그 극락정토가 지금 나툰 원인이 되었음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둘째, 일체의 부처님께서는 비록 본원(本願)을 일으키지만 본원을 또한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토의 의보와 정보의 장엄을 보여 법장의 숙원은 이와 달리 반드시 이루어졌음을 보여 행자의 극락왕생의 뜻을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셋째, 『관무량수경』에서 비록 미래의 중생이 번뇌로 고통받을 것을 말하기는 했지만, 중생이 고통의 모습을 듣지 않으면 정토를 좋아하고 예토를 싫어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왕생의 업도 또한 이룰 수 없으므로, 이제 본경에서 오악(五惡)・오통(五痛)・오소(五燒) 등을 자세히 설하여, 행자로 하여금 부지런히 수행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토에 왕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분과를 통해서 경전의 성립 순서를 『관무량수경』 → 『무량수경』 순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경흥의 교판적 시각을 파악할 수 있다.
2) 제목을 풀이함
먼저 동본이역인 위(魏) 백연의 『무량청정평등각경』, 오(吳) 지겸의 『제불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과도인도경』, 서진 축법호의 『무량수경』 등의 삼대 경전을 제시한 후, 자신이 대본으로 삼은 것은 축법호의 것임을 밝혔다. 다음으로 축법호의 『불설무량수경』이라는 제목에 대해 총별(總別)상대・인법(人法)상대・전지(詮旨)상대・수미(首尾)상대 등의 네 가지 상대를 시설하여 풀이하였다. 총별상대란 곧 ‘불설’과 ‘경’은 총(다른 경전과 공통된 것)이고 ‘무량수’는 별(본경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며, 인법상대란 ‘불’이란 인이고 그 나머지는 법이라고 풀이하는 것이다. 전지상대란 곧 ‘무량수’는 지(언어에 담긴 뜻)이고 ‘경’은 전(언어)이며 ‘설’은 두 가지를 겸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이고, 수미상대란 ‘권상’이라고 한 부분에서 ‘상’이 말미의 ‘권하’에서의 ‘하’와 상대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3) 본문을 풀이함
경흥은 본문의 풀이에 앞서 본 경에 대한 기존의 십분과설[3]서설분・현상분・계청분・서흥분・정설분・생생분・권신분・설익분・권청분・필희분 등의 열 단락으로 분과한다. 이 10분과설의 제창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할 때 현일과 법위가 주장한 것과 내용이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과 삼분과설 [4]유서(由序, 정설의 유래를 서술한 것)・정종분・유통분으로 분과한 것이다. 정영 혜원의 『무량수경의소』에서 제시한 것과 그 내용이 일치한다. 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경흥 자신은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본문을 설경인기분(說經因起分)・문답광설분(問答廣說分)・문설희행분(聞說喜行分) 등으로 삼분하였는데, 이러한 분과는 『불지경론(佛地經論)』에 의거한 것임을 밝혔다. 『불지경론』은 『불지경』에 대한 주석서로 본경을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성교소설분(聖敎所說分)・의교봉행분(依敎奉行分)으로 삼분하였다. 유식 계통의 논서로 주로 호법(護法) 계통의 유식사상에 근거하여 해석했고 일부 내용에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이 들어 있다. 신라시대 정토교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것에 있다. 이는 동시대인 중국 당대에 정토교가 『관무량수경』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무량수경』에 대한 주석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신라에서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에 이르는 짧은 시간에 원효・법위・의적・현일・경흥 등이 그 주석서를 지었는데,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 전문, 원효의 『무량수경종요』 전문, 현일의 『무량수경기』 일부, 일본 문헌에 인용된 내용을 복원한 법위의 『무량수경의소』와 의적의 『무량수경술의기』 등이 현존한다. 이 가운데 경흥의 『무량수경연의술문찬』은 혜원의 『무량수경의소』, 길장의 『무량수경의소』, 원효의 『무량수경종요』와 더불어 무량수경의 4대 주석서로 일컬어진다. 경흥은 기존에 전역된 여러 경론을 풍부하게 인용하면서 본문을 주석하고 있다. 또한 혜원(慧遠)・길장(吉藏)・회감(懷感) 등의 당대 학자, 원효(元曉)・현일(玄一)・법위(法位) 등의 신라 학자들의 입장을 두루 인용하고 있어서 그 학문적 폭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경흥은 이들 입장을 때로 수용하기도 하고 때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독자적 입장을 제시하였다. 본서의 두드러진 특성은 『무량수경』을 유식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에 있는데, 유식학 관련 논서인 『불지경론(佛地經論)』을 주석의 근거로 삼는 점, 정성이승(定性二乘)은 왕생할 수 없다고 하여 법상종의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근접한 점, 유식학의 입장에서 정토사상을 건립한 회감의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이나 법상종 학자인 규기(窺基)의 『법화현찬(法華玄贊)』 등에 실린 내용을 비판 없이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이다. 정성이승은 왕생할 수 없다고 하는 견해는, 현일・원효・의적 등과 같은 신라의 정토 관련 저술을 남긴 학자들이 모두 정성이승의 왕생을 허용한 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주목된다.
관련주석
  • 주석 1 경흥의 행적을 담은 기록으로 『삼국유사』「경흥우성조(憬興遇聖條)」, 『법화영험전』「顯比丘尼身條」가 현존한다.
  • 주석 2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 3권 (T37, No. 1748.)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 1권 (T37, No. 1774) 『금광명최승왕경약찬(金光明最勝王經略贊)』 5권 (대장경 미수록본으로 대정신수대장경간행회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김상현이 여러 서적에서 인용된 것을 근거로 하여 집일한 『집일금광명최승왕경경흥소(輯逸金光明最勝王經憬興疏)』가 있다.
  • 주석 3 서설분・현상분・계청분・서흥분・정설분・생생분・권신분・설익분・권청분・필희분 등의 열 단락으로 분과한다. 이 10분과설의 제창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할 때 현일과 법위가 주장한 것과 내용이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주석 4 유서(由序, 정설의 유래를 서술한 것)・정종분・유통분으로 분과한 것이다. 정영 혜원의 『무량수경의소』에서 제시한 것과 그 내용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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