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오랫동안 법보전에 봉안되어 오다가 현재는[1]2024년 대비로전(大毗盧殿)에 안치되어 있다. 해인사 창건 시기(802년)와 가까운 시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모신 쌍둥이 비로자나불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복장유물로는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는 시기의 귀중한 전적과 직물, 다수의 안립 물목이 발견되었다. 특히 1490년 중수 과정에서 안립된 복장물은 조선초기 왕실발원 복장유물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아 되어 그 문화사적 의의가 크다.
주요 복장유물
해인사 비로자나불의 복장에는 학술적 가치가 큰 유물들이 다양하게 안립되어 있었다. 복장에서 나온 주요 유물은 후령통, 발원문, 전적류, 직물류 등이며, 대부분 1167년경과 1490년 불상 중수 과정에서 함께 안립된 것이다.
1. 후령통
후령통은 기다란 원통형으로 윗부분에 기다란 후혈(喉穴)에 오색 비단을 감아[2]겉에서부터 초록→홍색→황색→남색→백색 순. 현재는 오색 장엄을 푼 상태. 장엄하였다. 이처럼 긴 후혈을 갖춘 후령통은 조선시대에 새롭게 나타난 형식[3]고려시대의 후령과 팔엽통 형태는 조선시대에 들어 후령통으로 통합되었다.으로,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 처음 등장한 뒤 해인사 복장물에서 정연한 체계를 갖추었다.
1490년에 안립된 후령통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크며, 원래의 형태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뚜껑과 후혈에는 진심종자를 방위와 상징색에 맞게 적고, 몸통에는 역시 방위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사방주(四方呪)를 썼다. 이는 16세기 『조상경(造像經)』(용천사본)이 개판되기 이전부터 이미 복장의식이 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2. 발원문
1) 『반야심경』 발원문
고려 의종과 거창 가조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사씨(史氏) 일가에 의해 안립된 『반야심경』 발원문은 1167년(고려 의종 21)에 불상의 중수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어, 불상의 하한 연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립된 『반야심경』은 당나라 현장(玄奘)이 번역한 것으로 전체 4면인 절첩장(折帖裝) 형태로, 권미제 아래에 주서로 발원문으로 적었다. 발원문에는 정해 9월, 국자진사(國子進士) 사겸광(史謙光)이 돌아가신 백부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사위(史褘)의 서방세계 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 경을 인출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 청초홍서중수발원문
1490년(성종 21)에 학조(學祖) 스님이 찬한 해인사 중수원문으로 청색명주에 주서로 필사되어 있다. 후령통 바닥에 접혀 있었으며 직물의 군데군데에 액체를 분무한 듯한 흔적이 있고, 액체가 닿은 부분은 약간 빳빳하다. 주요 내용은 선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뜻을 이어받아 인수대비(仁粹大妃)와 인혜대비(仁惠大妃)가 학조(學祖) 대사에게 명하여, 1488년(성종 19) 봄부터 1490년(성종 21) 봄까지 해인사의 여러 전각을 중수하고, 주불과 문수보현상을 수리·개금하였으며,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발원한다는 기록이다.
3. 전적류
1) 『범서총지집일부 대비로자나성불경등일대성교중일승제경소설일체비밀다라니』
다라니 왼쪽을 종이끈으로 묶어서 복장한 것으로, 현존 장차(張次) 수는 2장이다. 전체 수량은 24장(卜)은 10장, 30장(卜)은 4장으로 총 14장이다. 안동 보광사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복장유물 '범서총지집'과 동일한 판으로 47장에 '경오년(1150, 고려 의종 4) 6월 길일(吉日)에 평양 광제포에서 개판(改版)하여 인시(印施)하고, 선사(禪師) 사원(思遠)이 다시 교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 『 백지묵서사경』
이 사경은 백지에 묵서로 필사하여 두루마리로 장정된 것으로, 무량수경(無量壽經)으로 추정된다. 이어 붙인 분분이 떨어져 권수(卷首)가 결락되었으며, 하단부는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있다. 또한 두루마리 끝에는 말기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가는 밀집대를 덧대었다.
4. 직물류
1) 문사조각보
사리호를 싸던 보자기로 추정된다. 일곱색(남, 황, 청, 초록, 홍, 청록, 연두)으로 조각수는 81조각이며 대부분의 문양은 운문사(雲紋紗)를 사용하고, 2조각은 화문사(花紋紗)로 되어 있다. 이 문사조각보를 비롯하여, 운문사조각보와 문무라조각보 3점은 조선 초기에 제작 양식과 특징을 잘 갖추고 있어, 당시의 미적 감각과 수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2) 저고리
오보병 둘레에 감겨 있었다. 흰색 비단을 사용하였다. 넓은 목판깃과 수구쪽으로 소매가 좁아지고 기역 자형의 무가 달려 있다. 저고리의 뒤 중심선 아래에 다음과 같은 주서가 적혀 있다. "현시갯동 현증복슈 病厄災厄쇼뎨 生生셰셰극락셰계 친견미라슈리작불之원"
자료적 가치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 복장유물은 조선 초 세종 시기, 왕실 내명부 최고품계 비빈들이 발원하여 안립한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우수하다. 이러한 제작 배경에는 당대 왕실의 후원을 받고 불사를 이끌었던 신미(信眉, ?-?), 학조(學祖, 1431-1514) 대사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다양한 복장유물 가운데 특히 후령통은 안립절차에 따라 정확한 형식으로 제작된 물목으로, 조선 중기 용천사 『조상경』이 완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체계적으로 복장의식이 정립되었음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후령통은 조선시대 복장의식의 전형을 제시하는 자료로 평가되며, 조선초기 복장의식의 발전 양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림 2>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_황명 홍치삼년 해인사기
· 집필자 : 불교의례팀
관련주석
- 주석 1 2024년
- 주석 2 겉에서부터 초록→홍색→황색→남색→백색 순. 현재는 오색 장엄을 푼 상태.
- 주석 3 고려시대의 후령과 팔엽통 형태는 조선시대에 들어 후령통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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