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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된 고전미의 완성, 正覺의 본존상

석굴암 원형 주실의 중앙에는 불좌상이 있다(그림 1). 석굴암 안의 유일한 불상이다. 석굴암 안에는 현재 38구의 조각이 남아 있지만, 불상은 단 하나이다. 위치도 원형 주실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 우리는 이 상을 본존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정확히 정중앙은 아니다. 중앙에서 약간 뒤로 물려 불상 앞면이 정중앙이 되도록 했다. 이 본존상은 38구의 조각 가운데 유일하게 환조로 조각했다. 나머지 37구는 벽면에서 도드라지도록 하는 부조로 새겼다면, 본존상만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입체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그림 1. 석굴암 본존불좌상 ⓒ한석홍
본존상은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 1.6m의 대좌 위에 앉았다. 불상의 크기는 3.4m이며, 대좌와 불상을 합치면 5m에 이른다. 340cm 크기의 본존불은 토함산의 화강암으로 제작했다. 불국사의 삼층석탑과 다보탑은 유백색의 남산 화강암을 채석해 축조했지만, 석굴암은 온전히 토함산 화강암을 활용했다. 한 변의 길이가 350cm가 넘는 거대한 직육면체의 화강암을 채석해 조각하여 사람 키 높이의 대좌 위에 올려 앉혔다. 본존상은 오른쪽 옆구리를 뚫어 상이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인다. 석굴암 본존상처럼 팔과 몸체 사이를 뚫어두면 마치 상이 살아있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자칫 팔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 형식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가부좌란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얹은 다음, 왼발을 오른쪽 허벅지 위에 얹어 앉는 법을 말한다. 가부좌를 틀면 양 발바닥은 모두 노출되는데, 석굴암 본존상은 그 위에 발 금까지 그어 실재감을 더했다. 발목 앞에는 치마인 군(裙)의 자락이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그림 2). 앉아 있는 대좌는 삼단으로 구성됐는데, 가운데가 팔각이어서 ‘삼단팔각대좌’라고 부른다. 석굴암의 대좌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이른 ‘삼단팔각대좌’이며, 이러한 형식의 대좌는 이후 통일기 신라 불교조각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그림 2. 본존불 정면 하반신과 대좌 ⓒ국가유산청
1912년 무렵 촬영한 석굴암 유리건판 사진에는 석굴암 원형 주실의 천장 앞부분이 무너져 있다(그림 3). 19세기 말~20세기 초, 언젠가 주실 천장 앞부분이 무너져 내렸지만, 다행히도 천장에서 떨어진 돌덩이는 본존상을 비껴갔다. 본존상이 원형 주실 정중앙이 아니라 약간 뒤로 물러나 앉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본존상은 화를 면했지만, 하반신에 걸친 치마 끝자락과 대좌의 끝부분은 천장에서 떨어진 돌과 부딪혀 파손되었다. 치마 끝자락과 대좌의 보수한 흔적은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준다(그림 2).
그림 3. 일제강점기 석굴암 정면 ⓒ건판022824
두광(頭光)도 특별하다. 다른 불상처럼 두광을 상의 머리 뒤에 붙이지 않고, 뒷벽에 붙였기 때문이다(그림 4). 두광은 불상의 머리에서 솟는 빛을 가리키는데 신성함과 초월성을 상징한다. 원형 두광은 세로 길이가 28.2cm, 가로 길이가 24.2cm로 상하가 4cm 더 길다. 이는 아래에서 올려보았을 때 생기는 착시 현상을 고려한 것이다. 실제로 두광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완전한 원형으로 보인다. 원형 두광을 뒷벽에 붙인 것은 물론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머리에서 나오는 빛인 두광의 역할을 극대화해 줄 뿐 아니라 예배자가 원형 두광 안에 불상의 머리가 정확히 맞춰지는 최적의 장소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림 4. 본존 얼굴과 두광, 머리 뒷부분 ⓒ박진호
석굴암 본존상의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다. 백호는 말 그대로 ‘하얀 터럭’을 일컫지만, 미간에서 비추는 광명을 상징하므로 통상 빛나는 수정으로 표현한다. 석굴암 본존상의 백호는 직경 4cm, 두께 0.7cm의 국산 수정이며, 1966년에 제작한 것이다. 머리카락은 오른쪽으로 말려 돌아가는 소라 모양으로 새겼는데, 불교에서는 이를 소라머리카락, 즉 나발(螺髮)이라 부른다. 본존상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새겼는데, 위치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했다(그림 4). 불상의 손 모양인 수인(手印)은 상의 명칭을 알려준다. 석굴암 본존상은 오른 무릎 위에 얹은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를 촉지인(觸地印)이라 한다. 원래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있던 석가모니가 마왕(魔王)의 공격으로 상징된 번뇌를 물리치기 위해 오른손을 풀어 땅을 짚은 모습이다. 촉지인을 한 이 본존상은 누구일까? 석가불, 아미타불, 불법(佛法)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 등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석가모니가 깨닫는 순간에 취한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석가불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본다. 석굴암은 『화엄경』과도 관련이 깊다. 일연스님(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된 뒤 두 절에서 처음 주지를 지낸 이가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잘 알려진 대로 신림과 표훈이 바로 화엄학 승려이기 때문이다. 『화엄경』에 조예가 깊었던 이 두 승려가 불국사와 석굴암의 첫 주지를 지냈다는 점만으로도 석굴암이 화엄사상을 배경으로 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화엄경』은 석가모니 붓다가 이룬 깨달음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관련 연구자들은 바로 이 경에 나오는 석가모니 붓다의 이미지와 석굴암 본존상이 서로 관계 깊다고 여긴다. 석굴암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대좌를 포함한 본존불은 8세기 중엽~후반에 제작된 이후 줄곧 제 자리를 지켰다. 주실 천장 중앙의 세 조각난 천개(天蓋)도 그대로이다. 일제 강점기의 세 차례를 비롯해 1961년 우리 정부의 수리 복원 완료까지 여러 차례 석굴암 중수가 있었지만, 처음 조성됐던 그 자리에서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40구의 조각 가운데 본존상뿐이다.
그림 5. 본존 얼굴과 오른손가락 ⓒ임영애
석굴암 본존상의 제작자는 돌 가운데 가장 단단하다는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촉지인의 오른손은 마치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 높이를 저마다 달리했으며, 완벽한 비례의 이목구비와 신체, 당당한 어깨,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 등 어디 하나 소홀함이 없이 완전하게 이뤄냈다(그림 5). 이런 이유만으로도 석굴암 본존상은 명작이라 부르기 충분하다.
· 집필자 : 임영애(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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