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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과 왕생에 이르는 길: 왕생첩경도, 염불첩경도

「권수정업왕생첩경도」(왼쪽)와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오른쪽) 도판 ⓒ송광사성보박물관
조선(1781) / 79.2×39.5㎝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바로가기 /
조선시대에 불교는 왕실과 귀족 중심에서 서민과 부녀자들의 일상으로 깊숙히 퍼져나가게 된다. 서민들은 개인의 복을 구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절에 가서 기도를 했다.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께서 매일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가시던 모습은 우리에게 따뜻하고, 일상적인 기억이다. 이러한 마음을 담은 그림으로 첩경도라는 것이 있다. 첩경도는 원하는 바를 빠르게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송광사에는 1781년 지리산 영원암(靈源庵)에서 간행한 목판 한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목판 양면에 각기 다른 첩경도가 새겨져 있는데, 한 면에는 「권수정업왕생첩경도(勸修淨業往生捷徑圖)」(이하 「왕생첩경도」), 다른 한 면에는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中峯和尙普勸念佛捷徑圖)」(이하 「염불첩경도」)를 새겼다. 이 두 도상이 담긴 목판은 지리산에 소재한 영원암의 만일회(萬日會)가 주체가 되어 제작되었다.
왕생을 이루기 위한 「권수정업왕생첩경도」
「왕생첩경도」는 서방정토의 왕생을 위한 정업, 즉 염불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목판 변상도이다. 현재 송광사 소장본 외에 1571년 은진 쌍계사본, 1576년 금산 신안사본, 1640년 진주 지리산 영원암본, 1678년 원적산 운흥사본, 4종이 전해지고 있다.[1]김자현(2017), 조선전기 불교변상판화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45p.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첩경도가 지리산 영원암에서 1640년 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판본은 새김과 간행 기록 부분만 차이를 보이고, 실제 도상은 거의 일치한다. 조선 후기 영원암에서는 1640년 시기부터 1800년대에 이르기까지 첩경도를 2차례 새겨 유포하였으며, 정토왕생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첩경도를 사용한 것이다.
1640년 권수정업왕생첩경도(원각사 소장)
1781년 권수정업왕생첩경도(송광사 소장)
첩경도의 그림은 크게 상하로 구분할 수 있다. 상단은 중앙에 앉은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4위씩, 총 8위의 보살이 그려진 아미타설법도이다. 하단은 연지(蓮池)를 배경으로 9개의 원형이 3개씩, 3행으로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정토(淨土)의 구품왕생(九品往生)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상품왕생자는 보살, 중품상생자부터 하품상생자까지는 연화좌에 앉은 승려, 하품중생자는 연화좌에 상반신만 드러낸 승려, 하품하생은 연꽃의 모습만을 표현하여 각 단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염불수행을 위한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
「염불첩경도」는 「왕생첩경도」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도판이다.[2]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content/seoji?dataId=ABC_NC_10220_0001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 제명에 나타난 중봉화상은 원대 중봉 명본(中峯明本, 1263~1323)으로, 이 도상은 그의 사상과 동일한 맥락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본다. 도상을 살펴보면 중앙의 ‘심(心)’을 중심으로 십법계도(十法界圖)를 나타내고, 이를 둘러싼 게송은 미혹한 중생세계과 깨달은 성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염불수행자들이 지녀야 할 수행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화엄경』을 비롯하여 영명 연수(永明延壽, 904~975)의 『종경록』, 명(明) 하도전(河道全, ?~1370)의 『반야심경주해』, 『천목중봉광혜선사어(天目中峯廣慧禪師語)』 등 중봉이 활동하던 전후시기의 경전과 글을 인용하였다.[3]박인석(2024),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와 영원만일회, 한국선학 제68집, 96p. 도상 상단 난외에 ‘왕생정토부’ 부적이 새겨져 있어 염불수행 실천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상은 염불수행을 통하여 정토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다.
1781년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 도상
지리산 영원암 만일회
만일회는 염불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독송·염불하는 모임으로 염불계 중에서 특히 만일을 기약하고 결성한 것이다.[4]한상길(2006), 조선후기 불교와 寺刹契, 경인문화사, 67~68. 영원암 만일회에 대한 기록은 몇 가지가 전하고 있다.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1772년 지은 「연지만일회서(蓮池萬日會序)」, 추파 홍유(秋波泓有, 1718~1774)의 「영원만일회서(靈源萬日會序)」,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의 『경암집(鏡巖集)』에 실린 「영원암설회사적기(靈源庵設會事蹟記)」이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1772년 가을 백화(白華)와 문곡(文谷) 등의 법사들에 의해 영원만일회가 시작되었고, 10년이 지난 1781년 첩경도를 간행하였으며, 이후에도 모임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영원암은 현재 지리산에 소재한 영원사로 추정된다. 영원사는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청매 인오(靑梅印悟, 1548~1623) 선사 세 분을 모셔 선조대왕이 삼영전(三影殿)이라고 사액하였으며, 109대 조사스님들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6.25 전쟁 때 모두 불타버렸으나 대일 석주(大日昔珠) 스님께서 30여 년에 걸쳐 다시 중창한 절이다. 영원사는 지리산 7암자 중 하나로, 예로부터 선사들이 머물며 수행하던 곳이다. 첩경도는 영원사와 송광사의 교류 과정에서 송광사로 전해져 송광사의 염불수행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영원사 전경 ⓒ월간 송광사
송광사의 염불만일회
1879년 4월 15일 통허 치성(洞虛致性) 스님이 송광사 산내 암자인 자정암(慈靜庵, 현 佛日庵)에서 만일회를 창설할 무렵 영원암 목판을 복각한 것으로 추정한다.[5]송광사편집부(2022년 12월), 월간송광사 기사, 현세의 선생을 통해 극락왕생을 권장하기 위한 목판에 새긴 변상도, (송광사 율원장 대경 스님 구술, 편집부 정리) , 18-19. 스님은 1879년 하안거부터 자정암에서 염불만일회를 베풀며 화엄회도 2차례 열었다. 1885년에는 장소가 협소한 자정암을 떠나 큰절 보제사당에서 염불회를 이어갔는데 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 만일회 결사 이래 23년 동안 빛을 내고 극락왕생하거나 앉아서 입적한 수행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6]송광사편집부(2023년 1월), 월간송광사 기사, 염불만일회를 이끈 통허당 치성대사, 송광사 성보박물관, 26-27 영원암 판각 목판은 송광사에 전해져 염불만일회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송광사 소장 첩경도 목판은 사찰의 염불수행과 정토왕생을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진 도판으로, 지리산 영원암과 송광사의 염불만일회에서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혼란한 시대에 불법을 전하고,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목판에 새겨 다량을 인출하고, 보급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첩경도를 통해서 조선 후기 불교신앙과 지리산 영원암과 송광사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 집필자 : 김은진(기록문화팀)
관련주석
  • 주석 1 김자현(2017), 조선전기 불교변상판화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45p.
  • 주석 2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content/seoji?dataId=ABC_NC_10220_0001
  • 주석 3 박인석(2024), 「중봉화상보권염불첩경도」와 영원만일회, 한국선학 제68집, 96p.
  • 주석 4 한상길(2006), 조선후기 불교와 寺刹契, 경인문화사, 67~68.
  • 주석 5 송광사편집부(2022년 12월), 월간송광사 기사, 현세의 선생을 통해 극락왕생을 권장하기 위한 목판에 새긴 변상도, (송광사 율원장 대경 스님 구술, 편집부 정리) , 18-19.
  • 주석 6 송광사편집부(2023년 1월), 월간송광사 기사, 염불만일회를 이끈 통허당 치성대사, 송광사 성보박물관,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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