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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지정 사항 보물
제작 시기 고려
관련 유물 안동 연미사,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안동 시내의 북쪽에 있는 이천동 연미사에 있다. 마애불이 있는 곳은 안동에서 영주, 봉화로 향하는 교통로로서, 남쪽의 안기역(安奇驛)과 연결되는 교통로의 거점 중 하나였다. 연미사 일원은 ‘제비원’으로 불리고 있는데, 조선시대에 역원 역할을 하였던 ‘연비원(燕飛院)’이 있던 곳이다. 연비원은 ‘연원(鷰院)’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찰과 객관을 함께 갖춘 곳이었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연비원이 신라 때 창건된 사찰이라 하면서, ‘56장(五十六丈)의 미륵불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문인 구봉영(具鳳齡, 1526~1586)이 연비원을 지나며 적은 시에는 ‘우뚝 솟은 바위에 부처 얼굴 한 구를 깎아 만들었는데, 지붕을 만들어 덮어 반공중에 높게 솟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조선시대에는 마애불의 머리 위에 지붕 또는 누각 같은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이 언제 조성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안동 지역에는 마애불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하고 있다. 우선 연미사의 창건 설화를 살펴보면, 과거 객사인 제비원에서 일하던 연이라는 착한 처녀가 염불수행으로 공덕을 쌓았고, 이 공덕으로 인해 생긴 재물을 시주하여 제비원 누각을 짓게 되었다. 그런데 법당을 짓던 마지막 날 기와를 얹던 와공이 높다란 지붕에서 떨어지니, 온몸이 마치 기왓장 깨진 것처럼 산산조각이 났고, 영혼은 제비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고 한다. 이후 연이도 세상을 떠나 그 영혼이 제비원에 깃들었고,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연비사(燕飛寺), 연미사(鷰尾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화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병대장이었던 이여송(李如松, 1549~1598)과 마애불에 얽힌 이야기다. 이여송이 칼로 미륵불의 목을 쳐 땅에 떨어뜨리니 부처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고 하며, 지금도 목 부위에 이때 흐른 핏자국이 남아 있고 어깨에는 이여송이 타던 말발굽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미륵불을 조각한 두 형제가 하룻밤 만에 불상 머리를 만들어 바위 위에 얹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처럼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과 연비원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마애불이 안동 지역의 수호신 같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성주신앙’으로도 연결되는데, 민요 성주풀이에서는 ‘성주의 본고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 땅 제비원이가 본일러라’고 읊는다. 이와 같이 이 마애불은 안동 지역뿐만아니라 전국 팔도의 민간 신앙 대상이기도 하였다. 마애불은 전체 높이가 12.58m에 달하는 거대한 상으로, 산자락 끝에 걸쳐 있는 암반의 남서향면에 조성되어 있다. 마애불은 암반면에 불신을 저부조로 새기고 환조로 조성한 별석의 두부를 그 위에 올린 형태이다. 현재 머리 뒷면은 깨진 상태이다. 한편 마애불 머리 위쪽의 산비탈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이 있다. 마애불은 양 어깨를 덮은 대의의 모습, 왼손을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내려뜨린 수인 등을 1㎝ 미만의 얕은 두께로 부조하였다. 옷주름의 표현은 입체감이 전혀 없고 평면적이며 단순하다. 이 상과 같이 바위에 새긴 불신 위에 환조의 머리를 올리는 제작 방식은 논산 상도리 마애여래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등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 규모의 마애불에서 확인된다. 특히 이러한 제작 방식은 경주 약수계곡 마애입불상과도 유사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은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거대한 규모의 마애불로서, 제작 방식과 양식 등이 시대, 지역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곳에 조성된 마애불은 지역의 상징 역할을 하였으며,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대중성을 잘 보여준다.
· 집필자 : 박영민(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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