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기 무렵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우리나라의 정신세계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교 유입 초기 불·보살상의 조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불교 사상의 유입과 함께 그 문화가 영향을 미쳤던 것은 틀림없다. 작은 크기이지만 중국 초기 불상과 비슷한 형식의 불상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고, 5세기 무렵 조성된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불·보살상, 연화화생, 연화문, 비천, 화염문과 같은 불교적 요소들이 벽화로 그려졌다. 특히 벽화에 그려진 불교적 요소들은 중국 석굴 내벽의 그림들과 비슷한 도상을 보인다. 아마 이 시기부터 중국의 석굴사원 문화도 우리나라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 전래 초기부터 석굴사원과 마애불의 조성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새롭게 유입된 문화의 전파 및 적응 속도와 환경적 요인의 극복을 위한 시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석굴사원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가장 대표적인 불교문화였을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형식을 재현하기에는 자연환경의 차이가 확연하였다. ‘돌’로 이루어진 석굴사원과 불상을 조성하는 일은 ‘기술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암 등 무른 석질이 주를 이루는 중국, 인도와는 달리 국토의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는 돌을 다루는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기술이 확립된 이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는 다른 형식의 석굴사원, 즉 마애불의 조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석굴사원과 석불 문화는 우리 환경에 맞는 기술의 적응 과정을 거쳐 6세기 이후부터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마애불과 석불 뿐만아니라 석탑의 조성도 시도되어, ‘돌’은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주류를 이끄는 중요한 재료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마애불이 조성된 지역은 옛 백제 지역이었던 충청남도이다. 태안 동문리 마애여래삼존입상,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우리나라 초기 마애불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두 마애불은 바위면을 감실과 같은 형태로 파내거나, 중국 석굴사원의 중심주와 같이 기둥 형태의 바위 네 면에 불상을 새겨 석굴사원의 형식을 모방고자 하였다. 특히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의 석주형 바위 상면에는 목조 구조물을 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있어, 중국 석굴사원과 같이 석주 상면에 지붕을 얹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초기 마애불은 중국 석굴사원의 구조를 따르고자 하였지만, 깊은 굴을 조성하기 어려운 화강암의 특성상 이를 완전히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두 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감실, 중심주 등을 조성하고 이를 덮는 전각을 추가하는 등 석굴사원의 구조를 응용하여 우리나라 환경에 맞게 개선해 나갔다. 우리나라의 초기 마애불은 중국의 석굴사원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조성 환경을 극복하고 이를 재해석하여 ‘한국식 석굴사원’의 모습을 구현해 내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문화재청 · 불교문화재연구소
중국 공현석굴(巩县石窟) 제3굴 중심주 ©河南省文物硏究所
삼국시대 이후 조성되기 시작한 마애불은 충청남도를 비롯하여 신라 지역인 경주, 영주, 봉화 지역, 삼국의 문화 접점이었던 충주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마애불은 경주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지역과 지역을 잇는 하천과 가까운 곳에 조성되어 있어, 문화의 유입과 공유 양상을 함께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부터는 마애불이 ‘석굴사원’이라는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바위에 새겨진 노천의 마애불 그 자체가 하나의 ‘사원(寺院)’이자 예배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불교가 한반도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됨과 동시에, 비로소 우리나라 고유의 마애불 형식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마애불은 대체로 암반면을 다듬고 깊게 파내어 고부조로 조성되었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은 불상의 모습이 거의 환조에 가까울 정도로 입체감을 지닌다. 이러한 제작 방식은 고도의 조각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환조 석불 조성 기술의 발전과도 궤를 같이한다. 통일신라 8세기 이후에는 석불, 마애불의 조성이 증가하면서 석조 미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 함께 마애불의 조성이 늘어갈수록 기술적인 면에서의 변화가 발생하면서, 다양한 형식의 마애불이 조성되기에 이른다. 이는 암석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에 맞는 조각 기술을 발전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불교문화재연구소
경주 보리사 마애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마애불의 조각 방식은 고부조, 저부조, 선각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고부조는 삼국시대인 6~7세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주된 조성 방식이었다.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을 예로 들면, 머리에서 하반신에 이르기까지 불상의 전체 모습이 마치 바위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입체적이다. 특히 머리 부분은 완전한 환조로 조각하여 벽에서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조상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조각 방식은 중국 석굴사원의 입체적인 조각과도 유사하다. 고부조 마애불은 8세기 무렵 그 기술력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조각으로서의 입체감을 유감없이 발휘함과 동시에, 바위의 형태에 맞추어 상반신이 튀어나오고 하반신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우리나라 마애불 특유의 조각 방식이 구현되었다.
제작 방식의 다양화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저부조는 신체의 절반 이상이 입체감을 지니는 고부조와 달리 5㎝ 미만의 두께로 상을 얕게 조각하는 방식이다. 또한 선각은 양각이 아닌 음각 방식으로, 선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듯 바위면에 형상을 새기는 방식을 말한다. 경주 남산을 예로 들면, 9세기 무렵에는 경주 보리사 마애석불과 같이 부조가 얕은 저부조 방식, 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육존불과 같이 부조 없이 음각선으로 전체를 그려낸 선각 마애불도 조성되었다. 이러한 저부조 제작 방식은 특히 고려시대에 가장 선호되어, 이 시기 가장 많은 수의 마애불이 저부조로 제작된다. 한편 경주 남산에는 탑곡 마애불상군과 같이 이른 시기에 조성된 저부조 마애조상도 존재한다. 이와 같이 제작 방식의 변화는 반드시 시대순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마애불 조성의 증가, 교리의 다양화, 조성 환경의 극복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육존 ©문화재청 · 불교문화재연구소
마애불 조각 방식의 다양화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대형화’이다. 강도(剛度)가 높은 화강암의 특성상, 대형 마애불을 고부조로 조각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바위면에 신체를 저부조, 또는 선각으로 새기고 머리와 발 부분은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여 불상을 완성하는, 환조(丸彫)를 응용한 제작 방식이 고안되었다. 경주 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등이 환조와 저부조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대형 마애불의 조성이 증가하는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은 환조, 부조 결합 형식의 마애불이 다수 등장할 뿐만아니라, 저부조, 선각 마애불의 조성이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경주 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목 결구홈 ©박영민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머리 부분 ©국가유산청
이와 같이 석굴사원의 구현에서 시작한 한국 마애불은 인도, 중국과는 다른 조성 환경을 극복하여 우리나라 산천에 어우러지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산 정상이나 중턱, 강변 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바위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돌을 다듬어 부처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우리나라 특유의 마애불 조성 방식으로 정착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길, 발길이 쉽게 닿는 곳에 조성된 마애불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상징적인 존재이자 대중 신앙의 중심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집필자 : 박영민(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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