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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성의 토함산 석굴암·불국사 창건 신라의 東岳에 세운 불교 성지

전생과 현세의 부모를 위해 절을 세우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8세기 중엽 신라의 동악(東岳)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사찰이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대 재상을 지낸 김대성(金大城, 700~774)이 751년(경덕왕 10)에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짓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조성하였는데, 774년에 김대성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자 나라에서 불국사 공사를 마무리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한편 불국사 삼층석탑(일명 석가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중수 문서(그림 1, 2)에는 불국사가 742년(경덕왕 원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대에 완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착공 시점에 차이가 있다.
그림 1.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 ⓒ불국사박물관
그림 2.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불국사박물관
통일신라 중대에는 선왕의 명복을 기원하며 절과 탑을 세우고 불상과 범종 등을 조성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었고, 귀족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였다.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을 비는 ‘효(孝)’를 실천하기 위해 불상을 만든 것은 719년(성덕왕 18)에 김지성(金志誠, 652~720)이 조성한 감산사(甘山寺)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에서 선례를 볼 수 있으며, 김대성의 석굴암과 불국사 창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대성은 745~750년까지 신라 최고의 행정관서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中侍)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버지 김문량(金文良, ?~711)도 성덕왕대에 중시를 지낸 재상 가문 출신이다.
불사 기획자 김대성의 불교 신앙과 고승 표훈대사
창건자 김대성은 그의 부친도 재상을 지낸 고위 관료였을 뿐만 아니라 불사(佛事) 기획자이기도 했다. 불사 기획자로서의 면모는 『삼국유사』에서 보인다.
라고 하였다. 이는 김대성이 석굴암의 기본 설계와 불상 제작에 깊이 개입하였음을 암시한다. 아울러 불사의 과정이 매우 어려웠으며, 석불의 형상은 천신의 솜씨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재 석굴암 주실 천장의 천개석(天蓋石)은 설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세 부분으로 갈라져 있다(그림 3).
그림 3. 석굴암 주실 천장과 천개석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김대성이 천신에게 향 공양을 올린 '향령(香嶺)’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1989년에 석굴암 연구회에서 비석을 건립하여 사적을 기리고 있다(그림 4-1, 4-2).
그림 4-1. 향령비 앞면 ⓒ허형욱
그림 4-2. 향령비 뒷면 ⓒ허형욱
한편, 김대성은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그는 표훈(表訓, 생몰년 미상)을 찾아가 화엄을 배웠는데, 표훈은 의상(義湘, 625~702)의 직계 제자로서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초상조각이 봉안되었던 신라 십성(十聖) 중에 한 분이다. 또한 천제(天帝)에게 부탁하여 혜공왕을 탄생시킨 신승(神僧)이기도 하였으며, 『삼국유사 』에서는 ‘표훈 이후로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사찰이 건립되자 표훈을 석굴암, 신림(神琳, 생몰년 미상)을 불국사에 머물도록 하였다. 신림 역시 의상의 손제자(孫弟子)로서 불국사에서 화엄법회를 주관하였다. 이처럼 김대성의 불교 신앙과 주석 승려의 면면을 보면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에는 화엄의 영향이 농후하며, 이와 함께 당시의 불교신앙과 사상을 아우르는 독자적인 구상으로 창안된 것으로 보인다.
석굴암과 불국사, 동악 토함산에 세운 신라의 불국토
석굴암과 불국사의 창건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대성의 효심과 불교 신앙뿐만 아니라 두 사찰의 입지와 형태도 고려해야 한다(그림 5). 두 사찰이 위치한 토함산은 신라의 동악으로서 고대부터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온 성산(聖山)이기 때문이다. 특히 석굴암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원으로 해발 565m에 위치한다. 왕실 혹은 귀족들이 발원한 상당수의 사찰이 평지나 산기슭에 위치하는 것과 달리 토함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석굴암에서 멀지 않은 정상 745m 지점에는 동악신(東岳神)으로 제사 지내던 탈해왕(脫解王)의 사당지가 있어서 더욱 각별하다. 또한 석굴암은 동해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불교신앙의 힘으로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동해구에 창건한 감은사(感恩寺), 죽은 후 호국룡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한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등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호국(護國)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된다. 아울러 김대성이 불국사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나라에서 완성하였다는 점 역시 두 사찰이 국찰(國刹)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림 5. 불국사(좌, ⓒ국립문화유산연구원)와 석굴암(우, ⓒ경주시)의 입지와 형태 비교
한편 불국사는 토함산 서쪽 기슭에 높은 석축을 쌓아 만든 평지 사찰이고, 석굴암은 정상 부근 좁은 공간에 조성한 인공석굴로서 두 사찰의 형태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도 주목된다(그림 5). 평지에 넓게 자리한 불국사가 개방적인 형식의 대가람이라면, 석굴암은 산속 깊이 은폐되어 있어서 스님들이 의식을 행하거나 수행하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석굴암은 항마촉지인의 본존상을 중심으로 40여 구의 석불을 조성하여 부처의 깨달음과 불세계를 상징하였고, 불국사는 당시의 불교신앙과 사상을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전례 없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석굴암과 불국사는 동악 토함산에 구현된 신라의 독창적인 불국토라고 할 수 있다.
· 집필자 : 이경희(동국대 불교학술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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