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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눌 효봉(學訥曉峰)

효봉은 보조의 정혜결사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율을 바로 세우고 정법 불교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기울인 율사이다.
효봉(曉峰, 1888-1966)은 한국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사로 법호가 운봉(雲峰) 그리고 효봉이다. 법명은 원명(元明), 학눌(學訥)이며 속명은 이찬형(李燦亨)이다. 출가 전에는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법관생활을 하였다. 판사로서 독립운동가들을 심판해야한다는 것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판사직을 버리고 엿장수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던 중 38세의 나이로 신계사 보운암에서 스승인 석두(石頭, 1882-1954)에게 운봉 원우라는 법호와 법명을 받고 출가하였다. 이후 전국의 돌아다니며 정진하였는데, 1936년에는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의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1937년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서 10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던 중 평소 보조의 사상을 존경하던 효봉이 보조국사 제16대손인 고봉(高峰, 1350-1428)의 꿈을 꾸게 되었는데, 고봉은 꿈에서 효봉 학눌이라는 이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남겼다고 한다. 『효봉법어집』에 기록된 그 때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삼일암 효봉 법자에게(示三日庵曉峰 法子) 번뇌가 다할 때 생사가 끊어지고, (煩惱盡時生死絶) 미세히 흐르는 망상 영원히 없어지네. (微細流注永斷滅) 원각의 큰 지혜 항상 뚜렷이 드러나면(圓覺大智常獨存), 곧 백억의 화신불을 나투리라. (卽現百億化身佛)
이 인연을 계기로 효봉은 고려시대 지눌의 정혜결사 도량이었던 송광사에서 목우가풍과 정혜쌍수의 선풍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원을 세웠다. 효봉은 고봉화상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내며, 학눌은 지눌을 배운다는 의미이다.
1946년에 해인사 가야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정화불사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의 선학원으로 거처를 옮겨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56년에는 동산(東山), 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에 조계종 종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였다. 1957년 총무원장 역임, 1958년 조계종 종정으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1966년 10월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입적하였는데 그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효봉은 계학(戒)·정(定)·혜(學) 삼학(三學)을 가리켜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을 짓는 기술과 같다고 표현하면서 아무리 기술이 있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또 재목이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삼학 중 어느 것도 빠뜨릴 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효봉은 타락한 계율을 바로 세우고 정법 불교로 나아가려는 보조의 정혜결사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조선의 억불정책과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불교정책으로 인한 승풍 쇠퇴와 계율적 해이에 통감하며 제2의 정혜결사운동을 추진한 인물 중 하나이다. 효봉은 특히 “크게 정진하는 마음을 내어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고, 계율을 깨뜨리는 이로 하여금 청정한 계율에 머물게 하라”고 법문을 하였는데 이 같은 내용은 보조의 가르침에 근거하며, 계율을 지키고 이타행으로 나아갈 것을 설하였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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