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진종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쓰러져 가던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은 1864년(고종1) 전남 남원에서 태어났으며, 16세에 해인사에서 화월(華月)을 은사로 삼고 상허 혜조(相虛慧造)를 계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1884년 양산 통도사에서 선곡(禪谷)율사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아 대은 낭오(大隱朗旿) 율사의 계맥을 이었다. 이후 송광사 감로암(甘露庵)에서 『기신론』과 『법화경』을 수학하였고 곡성 태안사에서 수경(水鯨) 강백으로부터 『서장』과 『선요』를 배웠다. 1888년 문경 청화산 원적암에서 석교(石橋)율사로부터 『범망경』과 『사분율』을 배웠다.
58세 때인 1911년 대중을 향한 포교의 일환으로 종로구에 대각사를 세웠고, 1912년에는 인사동에 조선불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창립하여 대중포교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이후 안국동에 선학원(禪學院)을 세우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일인으로 참여하여 1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5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만일결사(參禪萬日結社)를 조직하였으며, 10월에는 해인사 금강계단의 전계사(傳戒師)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용성은 선∙교∙율에 정통한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의 한글 번역과 도시 대중 포교의 선구자였다.
계율 수호를 위한 용성의 노력은 일제 강점기에 행한 그의 노력으로부터도 잘 알 수 있다. 1926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무시한 채 승려들을 대처(帶妻)와 식육(食肉)할 수 있도록 한 조치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청하면서 불교계에서 계율을 수지하도록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조선시대 말부터 계율이 족쇄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한국불교에서 지계 의식이 약해진 가운데 일제시대 왜색불교의 영향과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은 그 명맥이 단절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용성은 한국불교의 계율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출가자의 지계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3대 교화지침, 세간 5계 등을 강조하면서 민족 정신 고양과 더불어 계를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이유로 용성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끈 승려이자 지계 정신을 드높인 승려로 잘 알려져 있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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