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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義相)의 계율관

의상은 화엄사상을 펼친 불교 사상가이며 소욕지족, 삼의일발, 불살생, 평등 등의 계율관을 실천한 율사이다.
의상(義湘, 625-702)은 신라 중기의 승려로, 한국에서 최초로 화엄종(華嚴宗)을 일으켰다. 19세 무렵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으며, 당으로 건너가 38세부터 8년간 화엄학을 공부한 후 귀국하였다. 신라로 돌아와 낙산사(洛山寺)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하며 261자로 이루어진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었으며, 이는 그의 관음신앙을 잘 보여준다. 이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엄사상을 펼친 의상은 문무왕 16년(676)에 태백산 부석사(浮石寺)를 시작으로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를 포함한 화엄십찰(華嚴十刹)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의상의 전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견해가 존재하여, 현재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상은 화엄 사상뿐만 아니라 지계 의식이 뛰어난 승려로 평가되며, 소욕지족(少欲知足), 삼의일발(三衣一鉢), 불살생, 평등 등의 계율을 철저히 실천한 승려로 알려져 있다. 소욕지족은 욕심을 버리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의 태도를 의미하며, 삼의일발은 승려가 지녀야 할 세 벌의 가사와 한개의 바리때를 말한다. 의상은 평생 철저하게 계율을 수지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계율행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많지 않다. 의상은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을 통해 『열반경』을 알게 되었는데, 이 경전은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화엄사상을 펼칠 당시 국왕의 토지와 노비 보시를 거절하는 근거로 이 경전의 ‘팔부정재(八不淨財)’를 들어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위아래 사람이 함께 나누어 쓰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열반경’에 8가지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이야기하였는데, 어찌 장전(莊田)을 가질 것이며, 노복을 부릴 것입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농사지어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의상은 당대(唐代)의 율승(律僧) 도선(道宣, 596∼667)과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선은 629년 『사분율』을 대승의 뜻으로 주석한 『사분율산번보궐행사초(四分律刪繁補闕行事鈔)』를 집필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도선이 의상에게 재(齋)를 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 외에도 도선이 집필한 『계단도경(戒壇圖經)』에는 정업사 계단이 완성된 후 27명의 제자에게 수계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신라 승려 지인(智仁)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근거리에서 직접 가르침을 청하고 중간 가교 역할을 한 제자가 있었다면 도선의 계율 연구가 의상의 지계 의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정(義淨, 635-713)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도선과 함께 당대의 율승 중 한 명인 의정은조문을 중국식으로 해석하는 도선을 비판하며, 설일체유부 계통의 율서 등을 번역하였다. 『송고승전』의 「의상전」에는 의상이 항상 ‘의정세예법(義淨洗穢法)’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언급된 ‘의정세예법’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청정의 관점에서 해석되기도 하고 불살생을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계율을 중시하는 경전과 중국 율승들과의 교류가 강조된 경전 및 중국 율승들과의 교류가 의상의 지계 의식 형성 및 실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의상의 계율관은 삼의일발, 소욕지족, 불살생, 평등 등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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