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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회해의 수행청규

백장회해는 당나라 선승이며, 선문의 종규인 ‘백장청규’를 만들어 수행에 전념하게 하였다.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는 당나라의 선승으로 속성이 왕(王)씨이다. 백장산(百丈山)에 살았기 때문에 백장(百丈)이라고 부르며, 법명은 회해(懷海)이다. 대지선사(大智禪師)라는 시호를 받았고 탑호는 대보승륜(大寶勝輪)이다. 일찍이 광동 조양 서산에 주석하던 혜조(慧照)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후 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 문하에서 수좌로 6년을 시봉하고 인가받았으며, 서당지장과 남전보원과 함께 마조 문하의 ‘삼대사’로 칭해졌다. 백장회해는 마조에게 인가를 받은 뒤, 홍주(洪州) 신오(新吳, 지금의 강서성 봉신현) 대웅산에 이르러 백총림을 개산하였다. 그 후 회해선사는 20년 동안 백장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선법을 펼쳤다. 또 백장회해는 선문의 종규인 ‘백장청규’를 만들었다. 당시 정해진 선원의 청규가 없어서 율종(律宗)의 규례(規例)의식을 따랐는데, 백장회해는 선종에 맞는 의식과 청규를 제창하는 <선문규식(禪門規式)>을 찬술하였다. 이로써 율원(律院)에 속했던 선원을 독립하게 한 것이다. 청규의 제정은 선종이 불교에서 독립된 종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서는 “선문의 독립은 백장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백장회해가 처음 만든 청규를 <백장청규(百丈淸規)>라고 하는데, 정식명칭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이며, 전체 구성은 8권 이다. 원래 당(唐)나라의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선종(禪宗) 사원의 규범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을 《고청규(古淸規)》라고 하였는데, 선종이 독립된 사원 ·제도 ·의식 등을 아직 갖지 않았을 때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등의 제도를 설정하고, 중승(衆僧)에게 동서(東序) ·요원(寮元) ·당주(堂主) ·화주(化主) 등의 각 직책을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당 ·송 시대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없어졌으므로, 1335년 원(元)나라의 백장 덕휘(百丈德輝)가 순제(順帝)의 칙명을 좇아 수정, 전국 선원에서 시행시켰는데, 바로 이것이 《칙수백장청규》이다. 9장으로 되어 일종청규(一宗淸規)의 대강(大綱)이 망라되어 있다. ‘청규(淸規)’란 청정한 대중들이 모두 함께 준수해야 할 규칙‧규율이라는 뜻이다. 곧 선종사원의 운영방침과 생활규칙, 그리고 규율 등을 제정한 정관(定款)으로서, 한 도량에서 수행 정진하는 구성원이라면 상하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지켜야할 공통된 규약[共住規約]이다. 백장회해의 백장청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로(長老)를 방장(方丈)으로 추대하여 법을 설하게 한다. 불당(佛堂)을 세우지 않고 중앙에 법당(法堂)을 세운다. 전 대중이 보청(普請)법에 의거하여 노동생산에 참여한다. 대중생활에서 규범을 어긴 자에 대한 벌칙을 세운다. <청규> 중에 노동생산 참여 규정은 백장회해가“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말로 강조했다. 노동 자체가 선수행이라고 보았다. 조선시대 말에 용성(龍城), 학명(鶴鳴)에 의해 선농불교(禪農佛敎)로 이어졌다.
백장회해의 선농불교는 농선병중(農禪幷重)의 보청법(普法)을 제창하였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보청법에 따라, 선원에서는 모든 승려들이 단체로 노동(울력)에 참가하여 산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고, 물을 긷는 일을 의무화하는 농선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백장선사어록(百丈禪師語錄)>에 따르면, 회해선사는 노동을 할 때면 가장 먼저 나섰으며, 매일 대중과 같이 작무(作務)를 했다고 한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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