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려(法礪, 569-635)는 사분율종(四分律宗) 가운데 하나인 상부종(相部宗)의 종조이다.
법려(法礪, 569-635)는 당(唐)나라 사분율종(四分律宗)의 세 분파[1]사분율종: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율종(南山律宗: 南山宗), 법려(法礪, 569-635)의 상부종(相部宗), 회소(懷素, 634-707) 의 동탑종(東搭宗).가운데 하나인 상부종(相部宗)의 종조(宗祖)이다. 상부종은 상부율종(相部律宗)이라고도 한다. ‘상부’라는 것은 법려가 상주(相州)에서 오랜 시간 활동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속고승전(續高僧傳)』의 「석법려전(釋法礪傳)」[2]『續高僧傳』卷22(T50, p. 615c4-29)에 의하면, 법려의 속성(俗姓)은 이씨(李氏)이다. 태어날 때 이미 치아를 전부 갖추었는데, 나이 들어 임종할 때까지 그 치아가 훼손되지 않았으며 단단하고 하얗기가 보통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이후 관직으로 인해 상주(相州)에서 살게 되었다.
법려는 15세에 연공사(演空寺)의 영유(靈裕) 법사를 은사(恩師)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대법(大法)을 좋아하였던 스님의 기상은 높았으며 마음속에 품은 뜻은 원대하였다. 위엄있는 모습은 우아했고, 심오한 이치를 즐거이 숭상하였으며, 말과 논의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에는 정홍(静洪) 율사의 문하(門下)에서 『사분율(四分律)』을 배우면서 겸하여 주석서를 지었다. 수년 후, 항주(恒州)의 연공(淵公) 율사에게 가서 율학(律學)을 배웠으며, 계율의 근원을 탐구하여 지엽(枝葉)들을 한데 모아 간략히 하고, 율법(律法)의 요강(要綱)을 강의하였다. 스님의 글은 간단하면서도 조예가 깊었다. 논리가 예리하고 견고하여 당시 율사들 가운데 상대할 자가 없었으며 고금(古今)에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받았다.
법려는 다시 강남(江南)에서 『십송률(十誦律)』을 공부하고, 업중(鄴中)에서 인연 있는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수(隋) 양제(煬帝)로 인해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고요히 은거하며 율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당(唐)나라 개국 이후, 기주(冀州) 임장(臨漳)의 현령(縣令)인 배사원(裵師遠)이 불법(佛法)의 홍포(弘布)를 위해 법석(法席)을 마련하여 스님을 초청하였다. 여러 해 동안 『사분율』을 강설하자 계율의 참된 뜻을 깨우친 자들이 많아졌다. 법려는 처음 배우는 사람이건 많이 배웠던 사람들이건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마음껏 배우게 해주었다.
635(정관 9)년 10월, 법려는 고업(故鄴)의 일광주사(日光住寺)에서 67세에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사분율소(四分律疏)』 10권, 『갈마소(羯磨疏)』 3권, 『사참의(捨懺儀)』와 『경중서(輕重叙)』 등이 있으며, 명도(明導), 담광(曇光), 도성(道成) 등의 제자가 있다.
상부종의 종조인 법려는 계(戒)의 근본은 지지(止持)와 작지(作持), 두 법(法)에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성실론(成實論)』에 근거하여 무작계(無作戒)의 계체(戒體)는 비색비심(非色非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려의 법손(法孫)인 회소(懷素, 725-785)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등을 근거로, 법려의 『사분율소』에 대해 열여섯 가지 과실을 지적하면서 『사분율개종기(四分律開宗記)』 20권을 지어 또 다른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법려의『사분율소』를 ‘고소(古疏)’라 하고, 회소의 『사분율개종기』를 ‘신소(新疏)’ 혹은 ‘신장소(新章疏)’라 하며, 그 종파를 동탑종(東塔宗)이라 한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관련주석
- 주석 1 사분율종: 도선(道宣 596-667)의 남산율종(南山律宗: 南山宗), 법려(法礪, 569-635)의 상부종(相部宗), 회소(懷素, 634-707) 의 동탑종(東搭宗).
- 주석 2 『續高僧傳』卷22(T50, p. 615c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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