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선대에 전해지는 현판은 ‘동수정업문(同修淨業文)’ 편액(1912년 제작), ‘금선대’ 현판, ‘청풍이백간주인(淸風二百間主人) 현판, ‘매심사(梅心舍)’ 현판, ‘진영각(眞影閣)’ 현판, ‘금선대기(金仙臺記)’ 현판 등이다.
‘동수정업문(同修淨業文)’ 편액은 1912년에 금선대의 문지방을 수리하면서 참여했던 대중들을 기록한 편액이다. 크기는 22.8×122.6cm이며, 흰 바탕에 검은 붓글씨로 직접 기록한 형태이다. 편액의 의미는 ‘정토왕생을 바라면서 함께 수행하는 것을 적은 글’이며, 금선대를 중수하며 그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함께 한다는 대중들의 염원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금선대(金仙臺)’ 현판은 성당 김돈희(惺堂 金敦熙, 1871~1936)가 쓴 것으로, 크기는 117.1×47.7cm이며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음각되어 있는 형태이다. 현판의 왼쪽에 ‘성당’이라는 호가 흰 글씨로 음각되어 있으며, 김돈희와 그의 호가 인장으로 찍혀 있다.
‘청풍이백간주인(淸風二百間主人)’ 현판은 검은색 바탕에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형태이다. 현판의 의미는 ‘맑은 바람이 가득 불어오는 두 칸 집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금선대의 빼어난 풍광과 청정한 수행처로서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라고 하겠다.
‘매심사(梅心舍)’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채집하여 만든 것이다. 짙은 녹색의 잎사귀 모양에 금색 글씨로 음각한 형태이다. 현판의 의미는 ‘매화의 마음을 가진 집’이라는 뜻이다.
‘진영각(眞影閣)’ 현판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형태이다. 1946년 만공 대사께서 열반하시고 경허 선사와 함께 스승과 제자 두 분의 진영을 봉안해 두면서 이름을 진영각으로 고치고 걸어둔 것이다.
「금선대기」 현판은 현재 두 편이다. 하나는 1916년 남현(南賢)이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19년 서예가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8~1933)이 쓴 것이다.
남현이 쓴 「금선대기」는 원목 바탕에 검은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형태이다. 만공 스님의 생애를 간략히 언급하고, 금선대 뒤의 바위를 보고 환희심을 느껴 금선대를 건립한 연고를 자세히 기술하였다.
김규진이 쓴 「금선대기」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형태이다. 1918년 2월에 금선대에서 만공스님을 만나 ‘금선(金仙)’으로 토굴의 이름을 삼은 연고를 물으며 문답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이어 금선대 주변의 풍광과 지맥을 묘사하여 도를 닦고 법은 연구할 만한 곳임을 설명하였다. 마지막으로 금선대가 연화장 세계같다고 찬탄하는 대중에게 만공스님이 “그대들 개개인에게 다 화장세계가 있다.”고 일갈하는 말로 마무리하였다.
번역문
남현, 〈금선대기〉
이런 곳은 많지 않아 희유하다. 토굴터가 덕숭대인데 금선대라고도 부른다. 선사의 이름은 월면이고 당호는 만공이시다. 속성은 송씨인데 전라도 김제의 교동에서 탄생하셨다. 13세에 출가하시고 24세 되던 해 7월 25일 밤에 진실한 상을 대오하고 참된 실상을 크게 깨닫고 무문인을 경허선사에게 받았다. 경허선사로부터 전해 받았다. 35세에 이곳에 와서 금선대 뒤의 바위를 바라보니, 쟁반같이 둥글고 기이한 서광이 빛났다. 그 기이한 현상에 마음에 환희심이 나서 곧 나무를 엮어서 초암을 지었다. 보임한 지 10년이 되는 45세에는 그 스님께 도를 배운 사방의 사람과 귀물 (鬼物)들이 모두 법은을 입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동안거 결제하고 선사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불법이 쇠퇴한지 5~6백이나 오래되었다. 세 분의 성인과 여덟 분의 현인을 따라 배우는 자는 많지만 장차 이곳 (땅)에이 곳에서 후세에 선풍이 나타나면 이 금선대가 근본 사표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신령이 도와주어서 고치고 엮어서 오른쪽에 불당을 낙성하니 여섯 가지 진동이 있었고, 하늘에서는 네가지 꽃비가 내렸다. 회향하는 날에는 불상이 방광을 하고 상서롭고 향기로운 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것은 모두 청정한 화상의 도와 덕이 삼천대천 세계에 널리 통하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금선대의 아름답게 단청한 법당의 모양은 항하사까지 오래도록 이어지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겁의 대중들은 구름같이 모여서 항상 화엄법회를 열것이다.
이 공덕으로써 널리 모든 사람 (중생)들을 제도하소서.
졸납 (拙衲)이 이르기를, ‘희유하도다’ 하였다.
세존 응화 2943년 천중 단오날 남현 삼가 씀.
원문
南賢, 「金仙臺記」
如是希有。峀德崇臺稱金仙。師名月面。堂號滿空。先姓宋氏。誕生全羅金堤校洞。十三出家。卄四七月念五夜半。大悟眞相。受無文印鏡虛禪師。卅五到此。望見石。上祥異盤菀。心喜奇之。仍搆艸庵。保任十載。齡次四五。於是爾間。道頗十方人與鬼物。咸添法恩。斯歲冬制。師謂弟子。佛法沉衰。五六百年。三聖八賢。數多學者。將現玆地。後世禪風。這臺爲源表。而改繕神助靈。佑落成。梵宇六種震動。天雨四花。回向佛像放光。顯瑞香雲。淸淨和尙。道德通澈。三千大千世界。金仙彩榭。長亘恒沙。不可說劫衆。海雲集常會華嚴。以此功德普度群品。拙云希有。世尊應化二九四三。天中日南賢謹序。
번역문
김규진, 〈금선대기〉
세존 응화 2945년 무오 중춘 (2월)에 나는 호서지역의 덕숭산 금선대에 이르렀다. 내가 만공화상을 만난 인연으로 물었다. “금선은 인도의 옛 부처입니다. 화상의 토굴 이름으로 삼은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말씀하시기를 “금선은 서쪽(인도)이지만, 또한 동쪽이며, 고불이지만 현재의 불타이기도 하다. 땅전갈이나 벌이 집짓는 곳까지 금선이 옮겨가서 다니지 않은 곳이 없으니, 내가 금선대로 가는 것도 나 혼자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이 땅은 해동의 명승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황하 3천년의 운에 반드시 3성 7현이 도를 얻어 이 땅에서 무수한 중생들을 위해 제도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누런 얼굴의 부처님이 다시 이 곳에서 대법을 펴게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아니면 미래에 있는 것인가. 내가 또시기를 취하고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대의 이름에 대한 것이다. 돌아보지 않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
금선대 북쪽으로 활처럼 휜 땅이 정혜사이고, 금선대의 남쪽은 수덕사이니 모두 천년 고찰이다. 정혜사 왼쪽의 작은 산이 구불거리며 내려 가다가뿔 같은 돌을 높게 만들어 놓았는데, 석각 아래에 석대가 마치 덩굴에 붙은 박처럼 솟아올라서 나그네가 대에 오르기에 좋다. 금선대에서 두루 살펴보면 동쪽으로 용봉산이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듯하고 남쪽에 있는 홍동산 에는 마치 말, 코끼리가 모여 있는 것 같으며 서쪽으로는 구름이 삼갈산에 걸쳐있는 것이 마치 나반존자가 안면도 섬들을 법왕대의 봉 앞에 펼쳐놓은것 같다. 조사가 임한 곳은 후에 참으로 도를 닦고 법을 연구할 신령한 곳이다.
내가 화상을 보니 14세에 출가, 25세에 깨달아서 무문인 無文印 을 저 경허 선사로부터 전해 받고 해동의 법의 종풍을 무성하게 하기 위하여 먼 하늘 에서 벼락이 치듯 온 세상을 진동시키니, 온 하늘에 태양이 밝게 빛났다. 소위 3천년의 시절 인연의 결과가 지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세상의 풍조를 돌아보니 심히 사나워서 중생의 근기와 인연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음을 알고 이곳에 세 칸의 모옥을 지었다. 침운, 혜월 두 선사와 더불어 보임한 것이 을사년 중추이다. 얼마 안되어 모옥이 무너지고 부서져서 비바람을 감당해내지 못하니 을묘년 10월에 사부대중이 정성을 다해 서로 도와서 같은 곳에 새로 집을 지었다. 방장을 모실 때에 엄동인데도 금선대 뒤의 원림에 꽃이 피고, 마치 봄처럼 나비가 전각 안에서 춤추며 날았다. 보는 이들이 희유한 일로 여기며, 꽃으로 장엄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소위 연꽃 으로 장식된 연화장 세계일 것이라고 하였다. 화상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말하기를 “자네 자신에게 화장세계가 있다.”고 한여름에 한기가 들 정도로 꾸짖어 말씀하시니, 제자가 얼굴이 화끈거리며 어쩔 줄 몰라 얼른 땅에 머리를 조아려 거듭 재배하고 그를 기록한다.
세존응화 2946년 (1919) 기미 가을 해강 김규진 서
원문
金圭鎭, 〈金仙臺記〉
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五年。戊午仲春。余至湖西德崇山金仙臺。氣相滿空和尙因而問曰。金仙西天古佛也。名之和尙土窟。有甚意旨。曰金仙西而亦東。古而即今。蝪之角。蜂之巢。無非金僊所遊。則余之臺行。獨不然乎。而況此山爲海東名勝。世稱當黃河三千之運。必有三聖七賢。得道於此地。濟度無數爲生。又安知無金口黃面者。復演大法於此乎。然其在過去耶。抑在未來耶。余且取其無時。不然者。而名吾臺焉。不顧謂之不可乎。臺之北一弓地。即定慧寺。臺之南即修德寺。皆千年古刹也。定慧之左。小巒蜿之走下。石角嶄裁。石角之大。石臺突起如匏付蔓。有客而佳。惟臺而觀。則東見龍鳳山。騰翥天際。南有弘東山。溱若象馬。西雲三葛山踞。如那畔安眠海嶋繡鋪於前法王坮峰。祖臨于後。眞修道硏法之靈道也。余見和尙。十四出家。二十五受了無文印於鏡虛禪師。蔚然爲海東法宗風。動十方霹靂長空煥日中天殆。所謂三千之運果。在今日歟。然而環顧宇內風潮。甚烈。衆生機綠。未熟。於是築三椽茅屋於此地。與枕雲慧月兩禪師。隱隱保任。即乙巳仲秋也。未幾。屋宇頽敗不堪風雨。至乙卯十月。顂四部衆竭誠相助。重建一所。方丈臨于巖上時。當巖冬。臺後園林花發如嗇蝴蝶飛舞。殿內見者。以爲希有希有。此所謂華藏莊嚴者乎。和尙大喝一聲曰。子子有薦。寒仲夏責熱弟子。石皷再拜。爲之記。世尊應化二千九百四十六年己未秋日。海岡金圭鎭書。




